초기경전 (7)중아함경

멸성제(滅聖諦)는 고의 원인인 번뇌가 소멸된 경지 곧 열반을 뜻하는 말이다. 소멸되어 없어졌다는 뜻이다. 보통 열반을 범어의 음대로 니르바나(Nirvana)로 읽는 수가 있는데 이 어원이 가지고 있는 뜻은 ‘불어서 껐다’는 뜻이다. 불이 붙고 있는 상태에서 그 불꽃을 불어서 꺼버렸다는 말로 번뇌 또는 욕망을 불꽃에 비유하여 그것을 꺼버렸다는 것이다. 때로는 적멸(寂滅), 원적(圓寂) 등으로 의역하기도 하는데 고요해진 상태로 번뇌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무한한 고요한 경지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이것이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니르바나(Nirvana)는 불교에서 제시하는 이상향(Utopia)이다. 이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없어지고 운명의 굴레도 벗어난다는 것이다.

불교는 중생들을 나고 죽는 생사의 운명에 갇혀 있는 존재, 곧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와 같다고 비유하여 말한다. 대승경전인 『법화경(法華經)』에서도 중생의 생사를 거듭하는 세계,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세계는 편안하지 못한 고통의 세상이라고 한다. 마치 불이 붙는 집 안에 갇혀 타 죽을 신세가 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삼계무안유여화택(三界無安猶如火宅)’이라는 경전의 구절이 이 뜻을 말하고 있다. 때문에 불교의 근본사상은 해탈과 열반을 얻자는 것으로, 스스로의 운명의 한계를 벗어난다고 하느냐고 의문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수도의 길, 성불의 길은 분명히 부처님 세계를 향하여 이 세상의 운명에서 초월하는 것이다. 육체 생활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아버릴 때는 육신이 남(生)과 죽음(死)으로써 인생은 운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 도림(道林) 선사와 백낙천(白樂天) 사이에 있었던 일화가 하나 있다. 한때 도림 선사가 깊은 산 속의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아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으면 그 모습이 마치 까치집처럼 보인다 하여 작소(鵲巢) 스님이란 별호를 얻기도 하였다. 이 스님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져 마을 사람들의 칭찬과 경탄이 자자하였다. 큰도인인 스님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도를 닦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비범하고 신기하다는 것이었다.

마침 당대의 문장가요 대시인이었던 백낙천이 이 소문을 듣고 우정 도림 선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가 산 속의 나무 밑을 찾아갔을 때 듣던 대로 도림 선사는 나뭇가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이 광경을 본 백낙천이 혹시 사람이 떨어져 다칠까 걱정이 되어 위험하다고 외치면서 빨리 내려오기를 권했다. 그러나 도림 선사는 묵묵부답하며 내려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백낙천이 거듭 위험함을 알리며 내려오기를 권했더니, 나뭇가지 위에서 도림 선사가 하는 말이 “위험한 건 내가 아니고 바로 그대일세.”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니 나는 땅 위에 있어 떨어질 염려가 없거니와 흔들리는 가지에 앉아 있는 스님이 위험하지 왜 날더러 위험하다 하시오?”

“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여 위험을 느끼지 않거니와 흔들리는 가지에 마음이 흔들리어 위험을 느끼는 쪽은 그대가 아닌가?” 이 말을 들은 백낙천이 할 말을 잊고 잠시 멍해져 버렸다는 고사가 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가 쉬었다. 혹은 없어졌다’는 뜻이다. 번뇌가 없어지면 이 세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열반을 적멸(寂滅)이라 번역한다. 고요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 도성제(道聖諦)는 멸성제(滅聖諦) 곧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밝혀 놓은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고의 원인을 없애고 열반을 얻을 수 있는가. 그 수행 방법에 대하여 설한 것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평범한 윤리적인 방법과 특수한 선정을 닦는 방법이 제시된다. 이것을 팔정도(八正道, Aryastnga-marga)라고 하는데 여덟 가지 바른 길을 닦아 가면 멸성제(滅聖諦)를 이룬다는 것이다.

먼저 정견(正見)을 가지는 일이다. 정견(正見)이란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진리를 바로 믿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정법대로 인생과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이다. 이 정견을 항상 바르게 생각하여 망각하지 않는 생활을 하면 바른 생활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정념(正念)과 정명(正命)이다. 명(命)이란 생활을 뜻하는 말이다. 바른 생활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지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선을 행하는 것을 두고 말하고 있다. 정업(正業)과 정어(正語)와 정사유(正思惟)가 정명(正命)을 이루게 하는 구체적인 것으로, 몸으로 하는 행위인 죽임[殺生]과 도둑질[偸盜]과 사음(邪淫)의 나쁜 행위를 일체 금하는 것이다. 말을 할 적에 거짓말[妄語], 이간질하는 말[兩語], 비단같이 번지르르하게 아첨을 하거나 남을 꾀는 말[綺語], 상스런 욕설[惡語] 따위를 금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사유(正思惟)는 마음속의 생각에 욕심[貪], 성냄[瞋], 어리석음[癡]을 없애는 것이다. 이것은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에서 나쁜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특별한 방법으로 선정을 닦아 마음을 항상 고요히 집중·통일되게 가지는 것이다. 이 팔정도(八正道)는 불교의 기본 생활규범으로 내면적이고 자율적인 선의지(善意志)의 발로(發露)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악업(惡業)을 멀리하고 선업(善業)을 행해야 수행의 공덕이 성취되는 것이고 이것에 의해서 정각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불교의 수행은 먼저 윤리정신에 입각한 계행(戒行)과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정화시키는 선정(禪定)의 수행과 거기에서 얻어내는 맑은 지혜로 설명된다. 이것을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이라 하는데 팔정도에서 이 삼학의 수련을 말하고 있다. 이 삼학은 현대적인 개념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윤리와 신앙과 철학의 3가지 면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거듭 말하자면 불교라 하는 종교가 어떤 종교인가면 수행을 요구하는 종교인데 거기에 윤리와 신앙과 철학이 삼위일체(三位一體)로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3년 3월 (제28호)

3. 멸성제

3. 멸성제 무지는 고(苦)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이 무지로부터 비롯된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을 이루는 것이 열반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理想)입니다. 부처님은 무명을 타파하고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시켜 열반에 이른 분입니다. 열반은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기에 때문에 해탈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바로 열반의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욕망과 화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반을 성취하면 인간의 생존도 함께 소멸되는 것으로 이해해서 꼭 죽음과 동일시하는 견해는 올바른 열반관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나는 심지를 끌어내린다. 불길이 꺼지는 것, 그것이 마음의 구제이다.”란 말씀은 열반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죽은 후에 기대되는 낙원의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열반을 성취한 사람은 완전한 인식과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지혜를 갖고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열반에 이른 사람은 세속의 일상사로부터 벗어나 현실 생활과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고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열반에 이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행복과 해탈을 위해 노력합니다.

초기경전 (6)중아함경

집(集)이란 말은 번뇌를 뜻하는 것으로서 초집생기(招集生起)의 의미이다. 본래 없던 것이 불러 모아 생긴 것으로 갈애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번뇌, 이것 때문에 괴로움의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번뇌는 범어의 ‘Klesa’를 번역한 말로 때로는 ‘혹(惑)’이라고도 한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정신 작용의 총칭이다.

이 번뇌도 그 종류가 많다. 우선 근본번뇌라는 것이 있는데 ‘탐(貪:욕심), 진(瞋:성냄), 치(癡:어리석음), 만(慢:교만), 의(疑:의심), 견(見:악견)’이다. ‘탐·진·치·만·의’의 다섯 가지는 성질이 둔하여 끊기 힘든 것이라 하여 다섯 가지 둔한 번뇌 곧 5둔사(五鈍使)라 하고, 견(見)의 악견에는 신견(身見: 무아의 이치를 모르고 육체를 나라고 집착하는 소견), 변견(邊見: 중도를 모르고 어느 한 쪽의 극단에 치우진 소견), 사견(邪見: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소견), 견취견(見取見: 잘못된 견해에 집착한 소견), 계금취견(戒禁取見: 잘못된 계율을 옳은 것이라 집착하는 소견)이 있는데 이 다섯 가지는 성질이 예리한 번뇌라 하여 오리사(五利使)라고도 한다. 사(使)는 ‘사역한다, 부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로 역시 번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열 가지 번뇌를 근본번뇌라고 하고 이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수많은 수번뇌(隨煩惱)가 있다고 한다. 또 흔히 말하는 백팔번뇌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번뇌의 수효를 108가지로 말하는 것이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이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상대할 때, 즉 다시 말하여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코가 냄새를 맡고, 혀가 맛을 보고, 몸이 촉각을 통하여 느끼고, 의식 속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기억할 때 여섯 가지의 감정인 좋고, 싫고,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중간과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중간의 여섯 가지를 각각 일으켜 6×6으로 36가지의 번뇌가 되고 이것이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적인 차별에 따라 다르게 일어나므로 서른여섯 가지를 3배하면 108가지의 번뇌가 된다 하여 ‘백팔번뇌’라 하는 것이다. 어떻든 번뇌가 원인이 되어 괴로움의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의 설명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과 그 주변의 모든 현실을 괴로움으로 해석하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그리고 이 괴로움의 결과는 집(集)이다. 다시 말해 번뇌 때문이라고 하였다. 원인에서 일어난 결과는 원인이 소멸될 때 결과도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사성제에 있어서 멸성제(滅聖諦)의 논의는 바로 이것이다. 고의 결과와 고의 원인을 알았을 때 고(苦)의 원인을 제거하여 괴롭지 않는 상태가 되자는 것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3년 2월 (제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