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의 그늘 속에 여름을 보내며

산간 생활에서 가장 지내기 좋은 계절은 여름이다. 날씨가 더워도 계곡에 물이 흐르고 산의 숲이 짙은 녹음을 드러내어 싱싱하기만 한 모습만 바라봐도 더위가 잊어지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보다 여름이 좋은 것은 한더위가 계속될 무렵에는 인적이 드물어 산속의 고요를 더 즐길 수 있어서다. 공산무인(空山無人)이라는 말처럼 인파가 밀려든 산은 제격이 아니다. 야호! 야호! 질러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 아마 산은 제일 피곤할 것이다. 산은 원래 말없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바람소리 물소리도 때로는 크게 들리는 것을 싫어한다. 가끔 밤에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고요를 깨뜨리는 때도 있으나 간헐적으로 들리는 이 소리는 산의 분위기를 해치지는 않는다.

여름으로는 낮에 매미가 운다. 이 매미소리는 숲의 왕음악이다. 얼핏 파정(破靜)의 방해군 같기도 하지만 매미들은 파한(破閑)을 알리는 여름 특유의 전령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수년 전에 중국에 가 우리나라 스님들이 과거 신라나 고려 때에 머물었던 선종사찰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어느 사찰 근처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붓으로 쓴 글씨를 포구한 족자가 눈에 띄어 이를 사왔다. 가게 주인은 이 글씨가 중국에서 제법 이름난 서예가의 글씨라 하면서 값을 꽤 비싸게 달라하여 주저하다가 보시하는 셈 치고 사자하여 사왔는데 지금도 은해사의 내 방에 걸려 있다. 대구(對句)로 되어 있는 오언절구인데 “용등해랑고(龍騰海浪高) 선조임유정(蟬噪林猶靜)”라고 쓰여 있다. “용이 오르니 바다 물결이 높고 매미가 우니 숲이 더욱 고요하다” 는 뜻이다. 글씨가 품격이 있고 뜻도 마음에 들어 사왔던 것이다.

이제 매미소리를 들을 때마다 뒤의 구절을 음미하는 습관이 생겼다. 떠드는 것이 조용하다는 건 상식을 무시하는 말이지만 한더위가 느껴지는 여름의 정서로는 매미소리가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여름 숲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는 매체가 된다. 그렇다면 짙푸른 녹음 그늘 속에 긴긴 여름날의 전체 분위기는 매미소리 하나로 더욱 살아나고, 산은 깊어지며 숲은 고요해져 버리는 것이다.

흔히 정중동(靜中動)이니 동중정(動中靜)이니 하면서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다는 사물의 본체와 작용을 동시에 드러내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적 차별 경계에 있는 두 가지 상황을 하나로 일치시켜 전체적인 묘(妙)를 살리는 이야기이다. 중도로 회통하는 본질적 이치는 어느 한쪽의 극단에 치우쳐서는 얻어지지 않는다.

옛날 어느 선사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다.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어떻게 하면 더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선사의 대답은 이랬다.

“벌겋게 달아 있는 난로 속으로 들어가면 될 거야.”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고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는데 더워 죽겠다는 사람에게 불을 활활 지펴 벌겋게 달아 있는 난로 속으로 들어가라니 피서법 치고는 상식에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격외담(格外談)으로 통하는 선의 경지에서는 오히려 이것이 상식이 된다. 물론 30 도의 더위도 못이기는 사람이 어떻게 40도의 더위를 감당하겠는가 하고 이론을 달겠지만 더 큰 더위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작은 더위쯤은 수월하게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크게 먹는다는 말이 있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를 할 때도 ‘마음 크게 먹어라’ 고 말한다. 사실 마음을 크게 먹고 살면 괴로움과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또 우리의 본래 마음은 모든 것을 이기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래 마음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다시 말해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번뇌나 망상의 마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무심했었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마음으로 돌아가 살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선수행의 가르침이다. 하기야 정의(情誼)에 사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아무렇지 않는 무심이 될 수 있으랴. 하지만 마음의 병을 이기게 하는 것은 분명 무심의 약 뿐인 줄도 알아야 한다.

시집간 딸이 아직 나이가 20대인데 갑자기 죽었다. 죽은 딸의 어머니가 절에 재를 붙여 놓고 매일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다. 어떤 때는 북받치는 설움을 견디지 못해 통곡을 한다. 49재 날이 다가와서 이제 딸을 잊어라 했더니 “내가 어떻게 내 딸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울었다. 그러나 잊어도 잊지 않는 것이고 잊지 않아도 잊는 것이 있다. 이 속에서 딸을 잊어야 한다. 이 묘법을 쓰고 살줄 알아야 한다. 섣달 부채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때로는 여름 추위가 있고 겨울 더위도 있는 수가 있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7월 제92호.

내가 있는 분위기

사람이 언제 어디에 있던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분위기라는 말은 원래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기체 곧 대기, 공기를 말하는 것이나 어떤 곳에 조성되어 있는 일반적인 상태나 기분을 말하기도 하고 또 개인의 주위 형편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분위기가 좋으면 우선 사람의 기분이 좋다. 뿐만 아니라, 분위기에 따라서 사람의 기분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분위기를 타고 감정이 흘러나온다. 찻집에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에 따라 음악적인 분위기가 달라지듯이 분위기에 따라서 사람의 감정이 다양하게 흘러나온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분위기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내 자신의 분위기를 나는 잘 모르는데 남이 잘 느끼는 특징이 있다. 물론 내 기분은 내가 아는 것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내 기분과 상관없이 남은 나에게서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낀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놀이를 하거나 어울려 일을 할 때 누군가 전체의 분위기를 잘 리드해 가는 사람이 꼭 있다. 말하자면 분위기 메이커이다.

개인이나 단체에 있어서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가는 것은 현대사회의 필수요건이라 할 수 있다. 분위기는 곧 환경과 같으므로 환경이 좋아야 사는 맛이 나는 것처럼 분위기에도 음식처럼 영양이 있는 것이다. 개인으로 말하면 내가 가진 분위기는 내 정신적 영양의 지수가 된다. 처음 보는 사람의 겉모습인 인상착의 등에서부터도 분위기를 느끼게 되지만 그러나 속에 있는 정신적 분위기는 오래 사귀어 보아야 알 수 있다. 옛말에 “말은 길을 멀리 달려보아야 그 힘을 알 수 있고 사람은 세월을 오래 사귀어보아야 그 마음을 알 수 있다.”(路遙見馬力 日久知人心)하였다. 사람 사이에 있어 오래된 인연일수록 서로 교감하는 정신적 분위기는 더욱 그윽한 법이다.

현대사회에 와서 사람들은 곧잘 감각적 분위기에 익숙해져 세련된 외모를 과시하거나 언술의 테크닉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평화롭고 안정된 분위기는 점점 부족해져 간다. 분위기도 인스턴트 분위기가 된다고 할까? 노래방에서 빙빙 돌아가는 오색조명처럼 관능을 방출하는 야한 분위기가 될 때가 많다. 때로는 고상하고 점잖은 분위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그 사람 본래의 삶은 고상하고 점잖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는 누구에게나 그 사람 자신에게 있어서는 진신진미(盡善盡美)한 것이다. 때로는 화를 내어 험악한 표정을 짓고 노기를 띠고 있어도 그것이 그 사람의 본래 분위기는 아닌 것이다. 다만 우리는 본래의 내가 가지고 있던 분위기를 곧잘 깨뜨리고 사는, 자기 스스로에게 무법적 파괴를 자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스스로 내가 있는 분위기를 부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이것은 마치 자연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필요 이상의 오버 액션을 하거나 지나친 말을 자주하여 구습을 나쁘게 가지면 이것이 바로 내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쁜 습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내가 있는 분위기를 해치는 것이 되는 것. 그러므로 사람은 분위기를 살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분위기는 사람이 조성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좋은 분위기를 조성하여 그것을 잘 보호해 가야 한다.

중국 선종의 육조가 되는 혜능선사의 법문에 인생에 두 가지 분위기가 있다는 법문이 있다. 육체적 분위기와 정신적 분위기라 하였다. 육체적 분위기를 신토장엄(身土莊嚴)이라 하였고, 정신적 분위기를 심토장엄(心土莊嚴)이라 하였다. 장엄이란 아름답게 꾸민다는 말이다. 사람이 살면서 몸을 잘 꾸며야 하고 마음을 잘 꾸며야 한다는 말이다. 몸을 꾸민다는 것은 여성들이 화장을 하거나 복장을 단정히 하는 것 등과 더 나아가서 말하면 건강을 잘 관리하는 것 등을 말한다. 말하자면 신체적 건사가 잘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물론 신체적 행위의 습관 같은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마음을 꾸민다는 것은 마음을 잘 쓰는 용심술(用心術)의 일단을 말하는 것이다. 예(禮)와 신의(信義)를 지키고 덕 있는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정신 위생을 좋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도 정신적 박테리아가 침입하는 수가 있다. 요즈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컴퓨터에서 바이러스가 생기는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병균에 감염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음을 잘 관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분위기 관리가 기실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다. 육체적 건강을 잃어서도 안 되며 정신적 건강을 잃어서도 안 된다. 내가 있는 분위기는 내 존재의 실제 영역으로 내가 그린 내 자화상이 걸려 있는 곳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09년 12월 109호

내가 나에게 미안하다

남에게 실례를 했을 때 “미안합니다.”하고 인사말을 건넨다. 본의 아니게 작은 실수를 범해 상대방에 누를 끼쳤을 때도 똑같은 인사를 한다. 사람이 살면서 이와 같이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될 때가 누구에게나 많이 있다. 미안하다는 것은 나의 언행이 상대방에게 좋게 받아드려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혹 언짢아졌거나 기분이 상했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내 언행으로 인해 불편한 심기가 되지 말라는 뜻의 인사이다. 남에게 수고를 끼쳤을 때도 감사의 뜻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기도 한다.

이처럼 미안해하는 마음이 생길 때 사람의 마음은 부드러워지면서 동시에 순간적으로나마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사과를 할 때는 언제나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때문에 사람은 일상의 생활감정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미안한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또는 부부가 서로에게, 그리고 사회활동을 하면서 인연이 맺혀 있는 사람 사이는 물론 심지어는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이 지구상에 같이 살고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은 모두 공생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공생의 삶이란 공동적 합성으로 이루어진 삶의 본질적 가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세상은 하나의 큰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네트워크란 말인데 이는 불교의 연기설에서 ‘법계무진연기’라고 설명하는 말과 같은 뜻이다. 전체가 하나의 큰 그물이라면 개체적인 개인은 그물의 한 눈이 된다. 화엄사상에서는 이 원리로 존재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전체에서 분리되어 개체로 돌아오면 응분의 자기 역할이 있다.

이 역할에서 객관적 평가를 하고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정신적 생계지수라 할 수 있는 개인의 존재가치의 지수가 될 것이다. 여기서 나의 지수가 낮아질 때 미안해지는 것이다. 성적이 나쁜 학생이 부모나 선생님에게 미안해하는 것처럼 내 역할이 부진할 때 생기는 미안함은 일상적 생활 에티켓에서 행해지는 인사말의 미안함과는 그 성질이 다른 미안함이다. 그것은 남에게 미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미안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나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하늘이 굽어본다.’라든지 종교인의 경우에는 신이나 불‧보살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진정으로 미안한 것은 나쁜 행동을 하는 죄의식 못지않게 내가 내 할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나는 남에게 해야 될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에게는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는 이기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최선의 결과를 바라는 것은 인과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으로 공짜를 바라는 허황된 것일 뿐이다. 설사 어떤 요행이 온다 하더라도 무거운 빚을 지게 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하는 일에 어처구니없는 모순이 생기는 수가 종종 있다. 하지 말아야 될 일을 억지로 하면서 해야 될 일은 하려하지 않는 경우, 관찰자가 볼 때는 분명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동쪽으로 가야 할 사람이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엉뚱하게 서쪽으로만 자꾸 가고 있다면 결국 시간 낭비가 되어 낭패가 생기거나 뜻하지 않던 조난이 다가올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 생활의 편리를 가져온 반면 삶에 대한 정성의 도수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내가 내 인생에 기우리는 정정이 낮을 때 기온 떨어진 날씨처럼 사회 전체가 차가운 사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상생활에서 마음 쓰는 것이 무성의해서는 안 된다. 작은 일 하나에도 진심을 가지고 성의껏 해야 한다. 엄벙덤벙 차일피일 무성의하게 시간을 낭비하며, 찾아서 해야 될 일을 방기해 놓고 유흥의 무드만 탐색하는 질적으로 저하된 삶을 사는 것이 문명의 대가가 아닌 것이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명언을 남겼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해야 될 본래의 일이 있다. 그걸 찾아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이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것을 미루면 빚에 이자를 물어야 하듯이 내가 해야 할 수고가 더욱 많아지게 될 것이다. 내가 나에게 미안해하면서 오늘의 일을 챙겨야 한다. 오늘의 시간은 오늘 밖에 없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9월 1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