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향산 보현사를 참배하고

버스를 타고 공항로를 빠져나와 평양시내로 들어갔다. 키 큰 버드나무들이 좌우로 숲을 이루어 서있으면서 가을바람에 나무 잎을 떨어뜨려 시멘트 도로바닥 위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북측에서 나온 안내원의 간단간단한 설명을 들으면서 먼저 하룻밤을 묵을 양각도 국제 호텔로 갔다. 북한에서 제일 큰 호텔로 대동강 안의 양의 뿔처럼 생긴 섬에 지었다고 양각도 호텔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방 배정을 받고 곧바로 식당에 가 점심공양을 하였다. 평화통일 불교협의회와 다른 단체에서 온 평양문화유적 참관단 290여명이 모두 이 호텔에 묵게 되었다. 배정된 방으로 올라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대동강이 흐르고 강 건너 우뚝우뚝 솟아 있는 고층 빌딩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후 2시부터 우리는 평양의 명소들을 차례로 관람하게 되었다. 먼저 찾아간 곳이 만경대 밑의 고향집으로 이곳은 김일성 주석의 생가라는 곳이다. 안내 설명을 해주는 여성이 뉴스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와 같은 세련된 목소리로 김일성의 조부모를 위시해서 김일성의 영웅적 투쟁을 힘주어 설명해 주었다. 만경대 위에 올라가니 평양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만 가지 경치를 다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는 만경대는 이름 그대로 툭 트인 시야가 넓게 펼쳐지는 곳이었다.

우리는 정해진 코스를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했는데 개선문 관람이 있었고 주체사상탑 관람이 있었다. 모두 김일성의 업적을 기념하여 1982년에 세운 것들이다. 주체탑은 높이가 170m나 된다. 소위 주체사상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탑이다. 북한 주민에게 있어서 김일성의 존재는 가히 신과 같은 존재임을 여러 가지로 느낄 수 있었다. 곳곳에 김일성을 기리는 탑이 세워져 있고 지금도 붉은 글씨의 구호를 세로로 적은 많은 탑들과 대형 초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사망한지 10년이 지난 그는 아직도 극진히 추앙되면서 곳곳에 탑과 초상화로 찬양되고 있었다.

저녁에는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였다. 5.1경기장 안에서 8만여 명이 동원되어 벌리는 집단체조는 가히 놀랄만한 볼거리였다. 특히 스탠드에서 2만여 명이 함께 벌린다는 카드색슨은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도 일사불란하게 훈련될 수 있는가하고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반면에 슬픈 생각이 가슴을 적셨다. 6살 어린이에서부터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인원이 한 치의 오차 없이 펼치는 매스게임이었지만,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도 기계처럼 될 수 있을까 하는 어이없음이 혼합되는 감정이었다. 호텔에 돌아와 잠을 청하면서 관람후유증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사람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알 수 없는 회의가 가슴 깊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음 날 우리는 묘향산으로 출발하였다. 시멘트로 포장된 준 고속도로를 2시간가량 달려 묘향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일요일인데도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는 한산한 길이었다. 도착하여 국제친선관람관을 관람한 후 보현사를 참배했다. 이 절은 이조 때 서산 스님이 머물었던 절로 현재 북한에서 가장 큰 절이다. 서산 스님의 호가 바로 이 절이 위치한 묘향산을 서쪽 산이라 한데서 붙여진 것이다. 주봉인 비로봉의 높이가 1909m이며 이 산에 자생하는 향나무, 측백나무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미묘해서 묘향산이라 불렀다. 절은 고려 중기 1042년에 창건되어 이조 때는 전국 5대사찰에 든 절이다.

서산스님은 묘향산이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명산이라 하였다. 금강산은 수려하지만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지만 수려하지 못한데, 묘향산은 웅장하면서 동시에 수려하다고 평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위시해 관음전과 영산전의 법당이 있고 서산대사의 사당격인 수충사가 있었다. 또 넓은 마당을 낀 대웅전 맞은편에 만세루가 있고 팔만대장경보관소가 수충사 남쪽에 있었다.

우리는 대웅전에 들어가 예불을 드렸다. 오분향 선창에 이어 7정례를 올렸더니 법당 안이 창불의 메아리로 꽉 찼다. 비구와 비구니 스님을 합쳐 60여명이 드리는 예불 음성에 가슴이 찡하는 그윽한 감회가 일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드리는 합동예불이라고 생각되었다. 절이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일부 건물 외에 그 후 다시 지어졌는데 우리처럼 조석예불도 올려지지 않는 것 같았다. 절에 목탁도 제대로 없었다. 우리는 이 절에 목탁을 선물하였다. 이 절의 주지인 청암이라는 노스님이 나와 간단한 인사말을 했는데 머리를 기른 처사 모양에 우리 보다 짧은 장삼과 짧은 가사를 입고 있었다. 법타스님의 말에 의하면 북한에서 학덕이 매우 높은 스님이라고 하였다.

법당 앞마당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천천히 경내를 두루 둘러본 후 4시경에 우리는 버스에 올라 바로 순안 공항으로 나왔다. 산문을 나오면서도 자꾸 묘향산이 그리워졌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1월 제60호

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때

일찍이 영국의 베이컨(Bacon)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한 이래 인간은 유식해야만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사람의 한 생애가 거의 교육에 바쳐진다는 것도 배워서 얻으려는 지적 욕구가 얼마나 강한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야흐로 정보시대에 접어든 현대에 와서는 세상의 정보에 둔감해서는 지식 생산에 밀려나 아예 비즈니스 전략 따위를 마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신세대를 기준하여 나온 말이겠지만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르면 컴맹이라 하여 글을 모르는 문맹과 같이 취급하는 시대가 되었다. 클릭 한번 하면 인터넷을 통해 온갖 정보지식이 흘러나온다. 가히 지식의 홍수시대라 할 정도로 각종 뉴스 등 우리의 머리에 입력되고 있는 지적 내용이 너무나 많다. 강물이 범람하듯 정보지식이 인간의 사고의식에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 홍수 속에서 인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지적인 피로에 시달리며,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하는 경우가 허다히 나타난다. 예로부터도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하여 아는 것이 근심 걱정을 만든다고도 하였다. 생각해 보면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내게 전달되지 않았으면 좋을 정보지식도 있다. 전혀 유익하지 않는 잡지식이 오히려 건전한 사고를 방해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불교의 선 수행에서는 악지악각(惡知惡覺)을 경계한다. 알기 때문에 나쁜 행동을 하거나 나쁜 습관을 익히는 것은 모두 악지에 속하고 감각적 유혹에 빠져 정신이 흐려지는 것은 악각이다. 이 악지악각 때문에 선정(禪定)을 이루지 못하는 폐단은 실제 공부에서 의외로 많이 나타난다. 알음알이 때문에 무심해 질 수 없는 경우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주 있는 일,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악지식 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하는 예도 의외로 많다. 지식으로 행세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지적 자만에 빠져 아는 척 하는 상을 내미는 것이 예사다. 실제로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고 지적으로 호도된 자기 알음알이를 남에게 과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은연 중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첨가하여 자기 마음대로 그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 양 억지로 합리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리하여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거짓 흉내를 내게 된다.

공자는 『논어』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면 아는 것이다”하는 말을 하였다. 모든 사이비 지식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잘못 아는 오해는 모르는 것만 못하다. 길을 가는 사람이 길을 잘못 들어서 엉뚱한 곳으로 간다면 애초에 아니 감만 못한 것이 아닌가? 자기가 갈 목적지에 그만큼 늦게 닿게 될 것이다. 오해는 언제나 오해를 낳는다. 또 사람이 지적인 고민이 많으면 자기 행복을 상실하게 된다. 아무리 부귀와 명예를 남 달리 누린다 하여도 마음이 편치 못하면 행복은 실종되고 만다.

중국 송나라 때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선사의 어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는 고관대작일지라도 잠깨고부터 머리에 지옥을 만들어 사는 사람은 깊은 산중의 화전민 촌의 가난한 사람보다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박한 삶에서 행복은 더 가까이 닥아 온다는 뜻이다.

온갖 정보를 이용하여 지식을 투입하고 전략적으로 머리를 써 살아가려는 현대의 생리에 문제가 있다. 공존의 윤리로 살아야 하는 중생계에서 오로지 남을 이겨보자는 전술만 횡행한다면 그 사회가 극락이 될 것인가 지옥이 될 것인가는 묻지 않아도 자명한 답을 내릴 수 있다. 지식이 인간의 사고수준을 향상시켜 주는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삶의 질을 높여 주는 것이 아니라 끌어내리는 역행을 한다면 이야말로 병든 지식이 되어버린다. 독이든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병든 지식을 함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될 필요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ꡒ지식은 정신의 음식ꡓ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또 이런 말도 남겼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달마대사의 선화(禪話)에 나오는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과 똑 같은 말이다.

대단히 역설적인 말이지만 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보다 모른 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모르면 마음에 동요가 없는데 앎으로서 동요가 일어나며 갈등이 시작 된다. 해골 썩은 물을 마신 원효대사가 모르고 마셨을 땐 갈증을 풀고 마음이 편안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순간 비위가 상하고 구토증을 느끼다가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는 유심(唯心) 이치를 깨닫게 되었듯이, 지식이 나를 괴롭힌다면 그 지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지식의 오만이 가중되고 있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지식의 오만 보다는 몰라서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는 사람의 얼굴 표정이 더 인간적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는 것이 병이 되고 모르는 것이 약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9월 제46호

모과나무 옆에서

수년 전 김해에 사시던 어느 노거사님이 평생 재배해 오던 분재를 200여분 반야암에 기증을 한 적이 있었다. 혹 소용이 된다면 절에서 재배해 보고 아니면 팔아서 불사에 보태 쓰라는 뜻에서였다. 나이가 많아 일하기가 어렵고 또 분재하던 농원이 경마장 조성지에 들어가 부득이 분재 나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 분재를 반야거사회에서 불사보조금 충당을 위해 얼마씩 돈을 내고 일부를 가져가고 나머지는 절 주위의 산비탈 맨땅에다 심어 버렸다. 분재의 수종은 모과나무와 느티나무가 대부분이었다. 해가 지나면서 이 나무들 가운데 잘 자란 모과나무에 작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모과가 한 두 개씩 열리기 시작하였다. 아직 꽃을 피워보지 못한 나무도 많이 있지만 100여 그루되는 반야 모과단지가 생겨 앞으로 해마다 모과잔치를 하게 생겼다. 분재가 아닌 특별히 사다 심은 큰 모과나무도 몇 그루 있는데 영축산 산등성이에 들어서 있는 소나무와 함께 나는 이 모과나무를 사시사철 즐기고 있다.

내가 모과나무 옆에 자주 가는 이유는 법당 우측에 심어져 있는 가장 큰 모과나무의 모양이 좋아서 이기도 하지만 모과나무에서 느끼는 특이한 이미지가 있어서 이다. 모과나무는 자라면서부터 울퉁불퉁한 목질 덩어리가 생겨 밋밋하게 자라는 다른 나무들과는 우선 둥치의 생김새가 다르다. 색깔도 군인들이 입는 군복의 얼룩무늬처럼 반점 같은 것이 생긴다. 결코 예쁘거나 고상한 나무는 아니다. 옛날에는 못생긴 사람의 얼굴을 모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모과나무는 뭔지 모를 매력이 있다. 게다가 사계에 따라서 다른 나무들이 하지 못하는 멋을 풍기기도 한다.

봄에 새잎이 피어날 때 연초록 잎이 햇빛에 반짝이며 자라다가 이내 꽃을 피운다. 옅은 주홍색 꽃잎이 피워 어떤 꽃들은 나뭇잎 뒤에 숨어 있기를 좋아한다. 꽃이 뽐내지 않고 조용히 뒤에 숨어 있기를 좋아하는 것은 모과 꽃이 제일이다. 그러다가 손가락만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면서 과일 나무의 위세를 과시하기 시작한다. 나누 밑에 가서 열매가 얼마나 열렸는지 궁금하여 살펴보면 처음에는 손가락 굵기만한 것들이 잎보다 작아 잎 속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가끔 모과나무 밑에 다가가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모과 열매를 세어 보기도 한다.

여름에는 열매가 제법 굵어져 나무를 보면 이제는 열매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열매의 색깔이 진초록이 되었다가 차츰차츰 노란 색을 첨가해 간다.

가을이 되면 노오란 열매가 멀리서 보아도 사람의 눈을 끌며 잎은 서서히 단풍이 들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때의 모과나무 모습이 일품이다.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모과의 모습이 열매마다 크기와 모양이 달라 관상의 매력이 느껴진다.

겨울이 되면 잎 떨어진 나무가 울퉁불퉁한 나신을 드러내며 서 있는 모습이 꼭 오래된 골동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모과나무는 사시사철 뚜렷한 제 모습을 보여주면서 은은한 즐거움을 선사해 주는 매력이 있는 나무다. 소나무를 군자의 나무라 하였고 대나무를 절개의 나무라 하였다면 모과나무는 서민의 심덕을 상징하는 나무로 보면 어떨까 싶다. 은은히 남모르는 덕을 간직하고 언제나 유용한 가치를 선물해 주는 겸손하기 짝이 없는 나무라 느껴져 사람도 이 모과나무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과일나무 중에 모과가 단연 한방의 약재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처럼 사람도 누구에게 약으로 쓰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져야 한다. 사람이 살면서 업을 잘못 지으면 악의 뿌리가 내려 선근을 파괴하고 남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병을 유발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남이 나로 인해 병을 얻는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있을 수 없다. 남이 병을 앓을 때 내가 약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모과나무로부터 배우는 하나의 교훈일 수 있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6월 제10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