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때

일찍이 영국의 베이컨(Bacon)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한 이래 인간은 유식해야만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사람의 한 생애가 거의 교육에 바쳐진다는 것도 배워서 얻으려는 지적 욕구가 얼마나 강한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야흐로 정보시대에 접어든 현대에 와서는 세상의 정보에 둔감해서는 지식 생산에 밀려나 아예 비즈니스 전략 따위를 마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신세대를 기준하여 나온 말이겠지만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르면 컴맹이라 하여 글을 모르는 문맹과 같이 취급하는 시대가 되었다. 클릭 한번 하면 인터넷을 통해 온갖 정보지식이 흘러나온다. 가히 지식의 홍수시대라 할 정도로 각종 뉴스 등 우리의 머리에 입력되고 있는 지적 내용이 너무나 많다. 강물이 범람하듯 정보지식이 인간의 사고의식에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 홍수 속에서 인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지적인 피로에 시달리며,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하는 경우가 허다히 나타난다. 예로부터도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하여 아는 것이 근심 걱정을 만든다고도 하였다. 생각해 보면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내게 전달되지 않았으면 좋을 정보지식도 있다. 전혀 유익하지 않는 잡지식이 오히려 건전한 사고를 방해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불교의 선 수행에서는 악지악각(惡知惡覺)을 경계한다. 알기 때문에 나쁜 행동을 하거나 나쁜 습관을 익히는 것은 모두 악지에 속하고 감각적 유혹에 빠져 정신이 흐려지는 것은 악각이다. 이 악지악각 때문에 선정(禪定)을 이루지 못하는 폐단은 실제 공부에서 의외로 많이 나타난다. 알음알이 때문에 무심해 질 수 없는 경우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주 있는 일,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악지식 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하는 예도 의외로 많다. 지식으로 행세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지적 자만에 빠져 아는 척 하는 상을 내미는 것이 예사다. 실제로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고 지적으로 호도된 자기 알음알이를 남에게 과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은연 중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첨가하여 자기 마음대로 그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 양 억지로 합리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리하여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거짓 흉내를 내게 된다.

공자는 『논어』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면 아는 것이다”하는 말을 하였다. 모든 사이비 지식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잘못 아는 오해는 모르는 것만 못하다. 길을 가는 사람이 길을 잘못 들어서 엉뚱한 곳으로 간다면 애초에 아니 감만 못한 것이 아닌가? 자기가 갈 목적지에 그만큼 늦게 닿게 될 것이다. 오해는 언제나 오해를 낳는다. 또 사람이 지적인 고민이 많으면 자기 행복을 상실하게 된다. 아무리 부귀와 명예를 남 달리 누린다 하여도 마음이 편치 못하면 행복은 실종되고 만다.

중국 송나라 때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선사의 어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는 고관대작일지라도 잠깨고부터 머리에 지옥을 만들어 사는 사람은 깊은 산중의 화전민 촌의 가난한 사람보다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박한 삶에서 행복은 더 가까이 닥아 온다는 뜻이다.

온갖 정보를 이용하여 지식을 투입하고 전략적으로 머리를 써 살아가려는 현대의 생리에 문제가 있다. 공존의 윤리로 살아야 하는 중생계에서 오로지 남을 이겨보자는 전술만 횡행한다면 그 사회가 극락이 될 것인가 지옥이 될 것인가는 묻지 않아도 자명한 답을 내릴 수 있다. 지식이 인간의 사고수준을 향상시켜 주는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삶의 질을 높여 주는 것이 아니라 끌어내리는 역행을 한다면 이야말로 병든 지식이 되어버린다. 독이든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병든 지식을 함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될 필요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ꡒ지식은 정신의 음식ꡓ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또 이런 말도 남겼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달마대사의 선화(禪話)에 나오는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과 똑 같은 말이다.

대단히 역설적인 말이지만 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보다 모른 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모르면 마음에 동요가 없는데 앎으로서 동요가 일어나며 갈등이 시작 된다. 해골 썩은 물을 마신 원효대사가 모르고 마셨을 땐 갈증을 풀고 마음이 편안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순간 비위가 상하고 구토증을 느끼다가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는 유심(唯心) 이치를 깨닫게 되었듯이, 지식이 나를 괴롭힌다면 그 지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지식의 오만이 가중되고 있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지식의 오만 보다는 몰라서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는 사람의 얼굴 표정이 더 인간적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는 것이 병이 되고 모르는 것이 약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9월 제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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