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스님─인과응보 법칙은 언제나 작동

인과응보 법칙은 언제나 작동 /

지명스님

장례식장에서 망인의 왕생정토를 비는 염불을 하다 보면, 다양한 방법으로 문상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기독교에서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던가.

일반인들이나 불교인들은 보통 영단을 향해 2배를 하고, 상주에게 1배로 맞절을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고 짐작되는 이들 중에는, 영단을 향해서 고개만 숙이며 묵념을 하고 상주를 향해서도 절을 하지 않는 이, 영단에는 절을 하지 않지만 상주에게는 절을 하는 이, 영단에 절을 하지 않지만 무릎을 꿇고 묵념을 한 뒤, 상주에게 절을 하는 이가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고개만 숙이는 것, 허리까지 굽히는 것,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이 형태만 다를 뿐, 망인에게 공경의 예를 올리는 자세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저분들은 왜 이 땅의 전통적 문상 방법을 무시 내지 파괴하면서까지 절하는 것을 “다른 신 섬기기”나 “우상숭배”와 연관지어서 생각할까.

여기까지 상념에 이르면서, 문득 “왜 내가 저분들의 교리나 그 해석 방법을 존중해 주지 못 하는가”며 반성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이는 저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엎드려 절하는 것이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는 망인에게의 절을 “우상숭배”나 “다른 신 섬기기”로 풀이할 수가 있다.

이렇게 물어보자.

내가 싫어하는 업, 풍습, 문화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어떻게 다른가.

또 나에게 친숙한 것들은 나에게 생소한 것들과 어떻게 다른가.

나에게 친숙하고 내가 좋아하는 행동들은 참답고 선하고 아름다우며, 그렇지 않을 행동들은 거짓되고 악하고 추한 것인가.

맘에 들지 않는 문화 만났을 때 흔들림 없이 대하는 ‘평화’ 중요 소나 말은 풀을 먹고 호랑이나 사자는 고기를 먹는다.

소나 말은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지만, 호랑이나 사자는 먹을 수 있는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먹는다.

생명을 해치지 않는 소와 말은 숫자가 줄어들지 않고 종족이 번성되어 왔지만, 남을 잡아먹는 호랑이나 사자는 이제 멸종의 지경에 이르러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왜 공격하지 않는 동물이 공격하는 동물보다 더 번성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소나 말의 업, 삶의 방법이 호랑이나 사자의 업이나 삶의 방법보다도 선하다거나 좋다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서 공격성의 호랑이나 사자가, 사람의 보호를 받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랑이나 사자에게 그들의 공격적인 업과 육식의 생존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따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업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친숙한 미풍양속이 무시당하고 파괴되는 것이 싫다.

그러나 친화적인 소나 말이 살아야 하고, 공격적인 호랑이나 사자가 멸종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싶지는 않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과응보의 법칙은 항상 작동중이다.

현실적으로 나에게 생소하고 내 맘에 들지 않는 업과 풍습과 문화를 만났을 때, 어떻게 흔들림이 없이 평등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금강경〉에서 “진리가 어떤 고정된 법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가르친다.

내가 규정하는 정의, 내가 좋아하는 선과 진리, 나에게 친숙한 업과 풍습과 문화에 매달리지 말자.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 친구의 생각과 행동도 나의 것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더욱이 어떤 위신, 명예, 사랑, 이득을 챙겨야 할 순간에는 하늘과 땅처럼 다를 수 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낱낱이 대립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나는 영원히 마음의 평화를 지킬 수 없다.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응보는 자연적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흐름이지, 내가 그것을 위해서 나의 평화와 행복을 내팽개칠 필요는 없다.

지명스님─우리는 행복 속에 있다

우리는 행복 속에 있다

-지명스님-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육체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을 막론하고 괴로움보다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한다.

그러나 행복을 찾아헤매는 인간에게는 행복을 계속해서 느낄 수 없는 마취성이라는 것이 있다.

향내음은 처음 맡을 때만 느낄 수 있다.

계속해서 동일한 냄새와 같이 있으면 그 냄새에 마취되어서 느낄 수 없게 된다.

얼마 전에 오대산에 사는 도반스님 한 분이 산더덕 수십 뿌리를 선사했다.

한 개를 꺼내어 껍질을 벗기니 그 향기가 방 뿐만 아니라 마당까지 진동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었지만 몇 분 지나서는 향기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향기를 계속 해서 맛보려면 방 밖에 나가서 한참 지난 후에 다시 들어와야만 했다.

사람은 향기에만 마취되지 않는다.

모든 면에서 마취된다.

돈에도 마취되고 사랑에도 마취된다.

감옥에서 나온 장영자씨가 생활비가 부족해서 다시 감옥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돈에 마취되어서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연애시절에는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던져버릴 듯하던 사람들이 결혼 후에 성격이나 이상의 차이 등을 내세워서 이혼하는 것은 그들에게 사랑이 없어서 가 아니다.

사랑에 마취되어서 사랑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 기쁨, 즐거움 등을 누리기 위해서 불행, 슬픔, 괴로움 등에 계속해서 드나들어야 하는 역설적인 운명에 처해 있다.

행복에 젖는 순간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행복감과 불행감 사이를 왕복해야 한다.

괴로움 속에서 다듬어진 사람이 아니면 즐거움을 알아볼 수 없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하고 물을 경우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있게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완전히 행복 하기보다는 비교적 행복하거나 비교적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불행한가.

그러지 않다.

우리는 행복 속에 있다.

단지 그것에 마취되어서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유마경의 서두는 이 문제를 이렇게 다룬다.

불타가 제자들에게 “마음이 청정하면 온 세계가 청정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제자가 불타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부터 마음이 청정하셨을 터인데 어째서 이 세계가 청정하지 못합니까?” 그러자 불타는 대답했다.

“해가 떠 있는데도 소경이 해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해의 허물이 아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행복을 알아보지 못할 따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을 알아볼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행복해지려면 불행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

기쁨을 얻으려면 슬픔에 잠겨야 한다.

즐거움을 얻으려고 고통을 곁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석가는 왕궁을 떠났고 예수는 십자가를 짊어졌다.

평범한 시민인 우리가 그들의 길을 그대로 답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행복해지는 비결은 실천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