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스님─무(無)와 부처님

○무(無)와 부처님○ 주변의 불자들에게 가장 많이 독송하는 경전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반야심경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260여 자에 불과 한 짧은 경전에서 우리는 무려 21개나 되는 무(無)자를 만난다. 감각 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각 감각기관에 해당하는 여섯 가지 인식이 무(無)로 부정되는 것까지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윤회로 들어가는 순관의 12연이 부정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기본 교리 가운데 하나인 사성제, 해탈과정인 역관의 12인연, 그리고 깨달음의 지혜까지 부정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철저한 무소득, 즉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아무리 굴려봐도 궁극적으로 얻을 바가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불도를 닦아야 하 는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무(無)자는 반야심경에만 있지 않다. 모든 경전에 나타난다.단지 다른 글자가 같은 의미로 쓰일 뿐이다. 어떤 경전에서는 공(空)자로 대체되고 다른 곳에서는 불(佛)자로 바뀐다. 또 같은 글자가 사용되지 않더라도 전체 문맥이 무(無)자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무(無)자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불법을 바로 아는 중요한 관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나는 선종에서 이 무(無)자를 가장 간단 명료하게 설파했다고 생각한다. (무문관) 제1칙으로 선보이는 조주선사의 무(無)자 화두를 보자. 한 수행승이 조주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조주선사는 무(無),즉 없다고 대답했다. 선종의 놀라운 예지는 무(無)자와 불성을 관련해서 생각했다는 데 있다. 대승의 4대 불경은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이다. 반야경 을 제외한 세 불경에서 무량겁 전에 성불한 부처가 전제된다. 법화 경이나 열반경에서 석존은 새롭게 태어나거나 죽는 부처가 아니라, 이미 구원겁 전에 부처를 이루었으면서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짐짓 몸을 보이고 거두는 화신을 뿐이다. 본래부처는 그대로 있다. 화엄경의 법신불도 지금 새롭게 만들어진 부처가 아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그대로 법신이 된다. `불성` 이라는 말은 우리가 없던 부처를 앞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이룬 부처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이미 있는 것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없는 것을 새로 구하려고 한다. 이미 있는 것을 알아보려는 사람은 자신 속에서 부처를 찾는 사람이고, 없는 것을 이루려는 사람은 밖에서 돈,명예, 권력 등을 얻으려는 사람이다. 자신 속의 법신 또는 부처를 알아보려는 사람은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밖으로 구하려는 사람은 아무리 이루고 또 이루어도 만족은 없고 고단하기만 할 뿐이다. 반야경에 축약인 반야심경의 무(無)자는 불성 즉 본래부처를 전제로 할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본래부처를 알아본다면 새삼스러운 해탈과정이나 깨달음의 지혜가 필요치 않다. 이미 얻은 상태에 있으므로 새롭게 얻으려고 할 것도 없다. 구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염려나 공포가 없다. 공 또는 무를 전제로 해서 본래부처 나 법신을 이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래부처 또는 불성을 전제로 해서 무(無)를 풀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주선사는 같은 질문에 대해서 한때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대답하는가 하면, 다른 때는 불성이 있다고 대답했다. 선의 공안을 의리선의 사구로 풀려고 하는 것이 방정맞고 무의미한 일이지만, 본래부처를 전제로 할 때 불성이 없다는 말이나 있다는 말이나 다 를 바가 없다. 어떻게 말하는가에 관계없이 본래부처는 항상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효봉스님이 자주 외치던 무(無)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나는 요즘 그 무(無)자에 몇 마디 더 붙이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본 각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일체의 인위는 피곤하기만 할 뿐 쓸모가 없다”고. 속된 잔꾀가 무(無)라는 말이다. -법주사 석

지명스님

지명스님─남 탓하는 어리석음 벗어나는 ‘참회의 절’

남 탓하는 어리석음 벗어나는 ‘참회의 절’

-지명스님-

절과 무아 수행 자신의 잘못과 업장을 참회하는데 불전에 엎드려 절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듯하다.

이마를 바닥에 대고 모든 잘못을 고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세상사가 뜻대로 되지 않고 많은 장애를 만날 때, 나 밖의 것에 원망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업보로 해석하면서 다겁생의 업장을 참회할 수 있다.

남을 탓하는 어리석음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보통 30만 배, 10만 배, 108배 등의 참회기도를 하는 불자들이 있다.

매일 3천배를 100일 동안 계속해야 30만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에, 보통 결심과 신체적 조건으로는 이런 기도를 계속할 수 없다.

많은 불자들 가운데서 일반화된 것이 108배이다.

15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행할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불보살과 화엄성중의 옹호를 느끼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건강유지에도 큰 도움이 된다.

참회, 기도, 수행 방법으로서의 절이 좋다는 것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사람을 향한 절은 그리 쉽지 않다.

“80된 노 신도라도 어린 사미승에게 절을 해야 한다”고 절집에서는 가르치는데,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신도집을 방문했을 때, 일단 전 가족이 스님께 3배를 올려야 하지만, 그 전통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부부가 사찰을 방문하더라도, 절하는 절차가 귀찮아서 남편은 차에 있고, 부인만 스님을 찾아 절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가족끼리 삼배하면 가정 화합 도모 장애와 우환을 만나는 이들도 필요 절이 스님과 대중간의 편안한 접촉을 막는 한 장벽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터에, (법공양)이라는 포교용 소책자에서 우룡큰스님의 “가족을 향해 무아의 삼배를” 이라는 법문 기록을 접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무아’ 수행을 “철저하게 하심해서 자기의 아상을 완전히 없애는 것”으로 풀이하고, 가족에게 절하는 것이 무아를 체득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가족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만만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나이 촌수를 가릴 것이 없이 심지어 아들 딸 손자 손녀에게까지 절할 수 있으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절을 할 수가 있고, 그러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원결이나 감정의 앙금이 붙을 곳이 없어서 만사가 편안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나와 인연 있는 여신도들 가운데는 남편을 향해 3배를 해온 이들이 많다.

경험담을 들어 보면, 아무리 깐깐한 성격의 남편이라도, 절을 하면서 절대 존경을 표하면, 마음을 풀고 물렁물렁해진단다.

절에 가거나 고성으로 염불 독경하는 것을 싫어하던 남편들도 마음을 돌려서 부인의 신행을 돕게 된단다.

고3의 아들에게 절을 해서 마음을 잡았다는 경험도 듣는다.

집에서 가족에게 절할 수 있는 사람은 밖에서도 누구에게든지 절할 수 있다.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자기를 한없이 낮출 수 있다.

그런데 가족에게 절하는 수행법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이가 있다.

바로 ‘남자’의 형상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아무리 신심 있는 불자라고 하더라도, 남편이 부인 또는 아들딸에게 절한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여성에 비한 육체적 강함을 남성의 우월로 착각하기 때문일까? 초라한 나에게 절할까 말까 망설이는 “남자”에게 나는 먼저 넙죽 절을 한다.

자동적으로 상대의 절이 뒤따른다.

왜 남자는 상대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절을 하는가? 멋진 남자는 오히려 절을 더 잘할 수도 있을 텐데.

예식장의 신랑들이 맨 바닥에 아무 스스럼없이 엎드리듯이.

가족에게 절할 수 있다면 출가 수행자에게의 절은 더욱 쉽다.

절은 세상을 돌리는 기운의 혈전 용해제와 같으니, 맺힌 것을 풀게 하고 막힌 곳을 뚫리게 한다.

특히 아무런 이유 없이 장애와 우환을 만나는 이들에게 절이 필요하다.

불보살을 향한 절뿐만 아니라 모든 스님네, 가족, 중생을 향한 절은 불가사의하게 업장을 녹이고, 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