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薦度)와 수행 지명스님 / 괴산 각연사 주지 “지금 이 순간부터 남을 행복하게 한다” 다른 이를 해하는 죄업 짓지 않고 남 위하는 것이 조상과 나의 천도 고은 시인의 작품 가운데 ‘장충식’이라는 시가 있다. 아버지의 사망 후, 사업을 이어 받은 아들이 자기 아버지로부터 배신당한 이, 버림받은 이, 망한 이, 손해 본 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지명스님─천도(薦度)와 수행 계속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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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스님─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지명스님-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 즉 “일체의 사물은 모두,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것”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존재하거나 말거나. 마음이 있거나 말거나. 해와 달은 뜨고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계속 반복됩니다. 바닷물은 누가 보거나 말거나 밀물과 썰물을 만들고, 바람은 사람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불어댑니다. 그러므로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자연과학적인 의미에서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명스님─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계속 읽기
지명스님─인연 받아들이는 주체로
◎인연 받아들이는 주체로◎
불교인들은 죽지 않아도 될 석가가 죽었다고 믿는다.
석가는 부처 가 돼 삶과 죽음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지만 혼자만 영원히 살면 중생들이 인생무상을 모르고 불도를 닦는\\ 데 게으름을 피울 것 이기 때문에 일부러 죽음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도 예수 에 대해 비슷한 믿음을 갖는다.
예수에게는 죽음이 없지만 모든 사람의 죄를 녹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보였고, 며칠 뒤 에 부활해 본래의 하나님자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웬만한 종교심으로는 이런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남을 위해, 그것도 가족이 아닌 인류 일반을 위해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 한 버스회사 인사담당자의 자살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한다.
불황에 시달리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부득이 정리해고를 해야 하는데 쫓아낼 부하직원을 솎아내는 일을 맡을 수 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자기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순간적인 격정에 의해 자살한 것도 아니다.
그는 평소에 태극에서 노사공생 의 원리를 찾고 그 이론을 체계화할 정도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부도가 나고, 그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한 죄책감에서 자살하는 기업 사장도 많고, 개인이 운영하는 업체가 부도를 맞아 남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이유로 구청장직을 사임한 이도 있다.
그러나 이 버스회사 간부의 죽음이 특별히 우리의 가슴을 흔든다.
그는 책임지지 않아도 될 위치에 있으면서 정리해고 문제로 죽음까지 가야 할 만큼 심각하게 고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국민 전체가 지금 이 인사담당자의 처지에 있다.
정리 해고가 가능해야 외국기업이 우리나라에 달러를 가지고 들어 올 수 있고, 그래야 기업간의 `빅딜`인지 뭔지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보다도 국제통화기금(IMF)의 도움을 받을 때 정리해고 를 국가 차원에서 이미 약속했다.
법으로 정하기 위해 노사정위원 회로 모임을 갖고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은 오직 모양새나 절차의 문제일 뿐이다.
국민 전체가 이대로 앉아 망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는 명목으로,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는 사람들을 직장에서 내 보내야 하는 딱한 처지에 있다.
이 상황을 자살로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안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공평한 고통분담이겠는데 이것이 어렵다.
물질 적 또는 외형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인 평등은 처음부터 없었다.
오직 상대적인 평등만이 있을 뿐이다.
국민 전체가 비교적 공평하게 고통을 감내하도록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통 체감도수를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쩌나.
국민 하나하나가 이 난국을 건지는 주체로 나서야한다.
객이나 구경꾼은 일이 잘되든 못 되든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다르다.
판을 깨지 않도록 미운 사람에게 떡 한개 더 집어줄 수도 있고, 자신만 배를 곯을 수도 있다.
양보하면서 일생을 살아온 어머니처럼 지금까지 손해를 보아 온 층이 또다시 `봉`이 될 수도 있다.
형편이 좋아지면 다른 사람 만 재미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집, 동네, 나라 전체를 위해 고민하는 사람은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주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며칠 전 서해 바닷가에서 음력 정월 방생을 했다.
세찬 바람으로 몹시 추웠다.
수백 명이 바짝 몸을 붙임으로써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물론 대열의 바깥쪽에서 바람을 받은 사람은 더 고생했다.
특별히 주체 또는 주인의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나쁜 자리에 서 내가 서 있다면 그 인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바람 을 피해 너나없이 이동하려 한다면 그 대열은 깨질 테니까.
바람을 많이 받은 이에게 뜻하지 않은 이점도 있었다.
겨울 해풍의 맛 을 제대로 보고 바다를 더 잘 음미한 것이다.
맛보는 만큼만 거두는 인생행로에서 말이다.
-법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