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스님─천도(薦度)와 수행

천도(薦度)와 수행

지명스님

/ 괴산 각연사 주지 “지금 이 순간부터 남을 행복하게 한다” 다른 이를 해하는 죄업 짓지 않고 남 위하는 것이 조상과 나의 천도 고은 시인의 작품 가운데 ‘장충식’이라는 시가 있다.

아버지의 사망 후, 사업을 이어 받은 아들이 자기 아버지로부터 배신당한 이, 버림받은 이, 망한 이, 손해 본 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이, 마침내 아버지와 원수가 된 이를 10여년 수소문해 찾아다니며 아버지 대신 참회하고, 힘 닿는 대로 보상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러고 나니 아버지가 꿈에 밝은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나타나서, “이제 나 구만리 장천 훨훨 날아다니게 되었구나”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생사를 뛰어넘는 한 줄기로, 아버지를 사는 아들이 되기도 하고, 아들을 사는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는 내용이다.

‘보통사람’으로 살다가 죽은 가족이 누구에게나 있다.

보통사람은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업을 짓는다.

남을 속이기도 하고, 해치기도 한다.

빚을 갚지 않아 남을 망치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있다.

교통사고를 비롯해서 갖가지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다.

모든 죽음에는 크고 작은 ‘한’이 남기 마련이다.

저 시에서의 훌륭한 아들은 아버지가 생전에 남에게 끼친 손해를 보상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나는 그만큼 훌륭하지도 않고, 여유롭지도 않다.

조상으로부터 손해 본 사람들을 낱낱이 찾아다닐 엄두도 나지 않는다.

또 나의 조상이 한을 품었다고 해서 세상에 있는 시기, 질투, 증오, 모함, 속임을 다 없앨 수도 없다.

일체의 질병과 사고를 없앨 수도 없다.

원수진 사람이 있다고 해서 무협소설의 주인공처럼 칼을 들고 찾아다닐 수도 없다.

한 마디로 내 조상의 빚과 한을 다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속 시원하게 풀어 줄 수가 없다.

못난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내 조상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알아낼 수는 없지만,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죄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다.

죽이고, 훔치고, 삿된 음행한 죄는 몸의 죄에 속하고, 거짓말, 아첨, 이간질, 욕설 험담은 입의 죄에 속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뜻의 죄에 속한다.

조상이 품은 한의 범위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은 재물, 사랑, 음식, 권력과 명예, 안락으로 이루어진 오욕락을 원한다.

오욕락의 반대만 겪고, 타인으로부터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열 가지 죄악을 부당하게 받고 죽음에까지 이르렀다면, 한이 생길 것은 뻔하다.

그런데 말이다.

멀리 조상의 죄와 한을 생각하기 전에, 여기 내가 이 순간에도 갖가지 악업을 짓는다.

다른 이를 불쾌하게, 억울하게, 아프게, 슬프게, 상처받게, 괴롭게, 또는 망하게 만든다.

또 내 가슴에는 욕망이 가득하다.

나의 복과 덕과 능력에 비해서 더 큰 명예를 원한다.

잘 되는 일은 나의 복으로 돌리고, 잘못되는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린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불만과 욕망으로 가득한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참회이다.

금생에 지어온 죄업,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생에 지어온 죄업을 참회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선망 영가들이 알게 모르게 이어온 모든 죄업도 같이 참회할 수 있다.

또 있다.

세상에는 인연과(因緣果)의 법칙이 있음을 인정하고, 내가 원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채워지지 않거니와 설사 채워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일 뿐, 얼마지 않아 물거품처럼 부서져버린다.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부질없다.

이 깨달음을 나 자신과 조상에게 아주 진지하게 말해 줄 수 있다.

또 나는 원을 세울 수 있다.

몸과 입과 뜻으로 남을 해하는 죄업을 짓지 않겠다고, 오히려 남을 위하고 살리는 일을 하겠다고, 그러면 조상천도가 나의 천도요, 나의 천도가 그대로 수행이 된다.

불교인은 절에 가서, 기독교인은 성당이나 교회에 가서, 꽃이나 향을 올리고 조상 천도를 빌고 자신을 돌아보며 앞길을 닦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남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일을,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당장 저 ‘장충식’과 똑같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불교신문 2348호/ 8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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