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뭣고 화두법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뭣고?’ 라고 합니다.
표준말로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정확히 쓰면 일곱 자인데,
경상도 말로는 ‘이뭣고’ 석자입니다. 그래서 참선 해나가는 데에는
‘이뭣고?’ 이렇게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해 왔습니다.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뿐이어야 합니다.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슬플 때는 슬픔에 빠져 가지고,
점점 슬픈 생각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묵은 생각을 일으켜 내 가지고 점점 더 슬픔에 빠집니다.
어떤 괴로운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 근심 걱정을 없앨려고 하지를 않고,
점점 근심이 더 치성하게 일어나도록 근심이 될 만한 사건을
더욱 더 연상을 해내서 더 근심에 빠집니다.
성이 날 때에는 빨리 그 생각을 돌이켜서 성나는 생각이 가라앉도록 해야
자기에게 유익할 텐데, 점점 성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저 생각·
고약한 그 지나간 생각을 되살려 내 가지고 더 깊이 그 성나는 생각에
빠져 들어가서 자기가 자기를 괴롭혀 들어갑니다.
이래 가지고 중생은 불붙은 데다가 스스로 석유와 휘발유를
끼얹어 가지고 점점 더 불을 치성하게 만들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픈 생각이 나도 바로 ‘이뭣고?’,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바로 ‘이뭣고?’, 괴로운 생각이 나도 그 괴로운 생각이 다음
두 번째 생각으로 번져나기 이전에 바로 ‘이뭣고?’ 로
돌아와 버리는 것입니다. 도인이라고 해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되, 그 일어나는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괴로움에 빠져 들어가서 나중에는 그 한 생각이 원인이 돼 가지고
건강을 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한테 그 좋지 않은 생각을 터뜨려 가지고
다른 사람 마음까지 괴롭히고 일까지 그르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니 생사윤회에 안 떨어지고 배기겠습니까?
참선은 일어나는 한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번 일어난다 허드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건 나쁜 생각이건, 슬픈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성나는 생각이건, 과거 생각이건 현재 생각이건,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뭣고……?” 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합니다.
무슨 기분 나쁜 소리를 들어서 성이 푹 솟구치더라도 심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들이 사용한 화두가 1700인데, 이 ‘이뭣고 ?
‘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1700공안이 일시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쪼꼼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 요새 일본식 참선이 수입이 돼 가지고 화두 하나를
이리저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다른 화두를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를 해결 지어 놓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해서, 10개 20개……, 화두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며 참선을 하는 지성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런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 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쪼끔 생각 있는 사람이면 능히 알고도 남을 상식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안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를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합니다. 활구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뭣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
내쉴 때, “이… 뭣고……?” 다 내쉬면 스르르 숨을 들이마시되,
들이마시면서도 아까 그 ‘이뭣고’ 한 그 의심의 그 여운이
그때까지 오도록 그렇게 조용하게 관조를 하는 것입니다.
3초 동안 머무르는 동안에도 그 의심을 묵묵히 관조하다가
조용하게 내쉴 때에 다시 또, “이…뭣고……?”
처음에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이…뭣고……?
” 이렇게 하다가 차츰차츰 딴 생각은 줄어들고 ‘이뭣고 ?’ 가
잘 되어지면, 두 번 들이마셨다 내쉴 때 한 번씩만 ‘이뭣고?’를 들다가,
나중에 더 익숙해지면 다섯 번 호흡하는 동안 ‘이뭣고?’
한번의 의심으로 쭉 이어지도록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공부가 더욱 익숙해지면
아침에 눈 딱 떴을 때, “이…뭣고……?
” 한 번 해놓으면 하루 종일 그 ‘ 이뭣고?
‘ 한번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될 때가 꼭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깨달을래야 안 깨달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이 바로 알 수 없는 화두 하나로써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화두를 들고서 밥도 먹고, 똥도 누고, 차도 타고, 걷기도 하고,
사람하고 대화도 하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팔만 사천 마구니(魔軍)가 엿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팔만 사천 마구니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인데,
화두가 독로(獨露)한 사람한테는 와서 들어 붙지를 못합니다.
잠깐 잠깐 필요 있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필요한 일을 적절히
처리하되, 나의 이 화두 일념은 근본적으로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요,
우주법계의 주인공이 되어서 우주법계를 내가 요리해 나가고,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운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이 바로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팔만대장경에 그렇게 많은 법문이 있지마는
그 말씀을 하나로 뭉치면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이 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