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란 무엇인가?
활구 참선법
그러면 그 활구참선법이란 어떠한 것이냐?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일체 이론을 배제하고
오직 꽉 맥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여
일체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하는 참선법입니다.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한 다음,
셋째는 화두를 의심해 나가는데,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에 확철대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참선법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발이
여기를 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몸뚱이가 제멋대로 온 것이 아니고,
남이 오자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지금 편의상 ‘자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알 수 없는 놈’이 여기를 오기로 결정을 해서 그 놈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
그 명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몸이 움직여져 가지고 발로 걷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해서 여러분은 여기에 와진 것입니다.
그러면은 무엇이 여기를 ‘가자!’ 하고 이렇게 명령을 했겠느냐?
그놈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놈’인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이 편의상
지어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한 것이며 마음이다· 성품이다·
주인공(主人公)이다· 뭐 얼마든지. 우리 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놨을 것입니다 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그만두고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에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 천만번을 그놈이 이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사람 옷도 몇 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 천만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가 봤을 것이고,
천당에도 가 봤을 것이고, 귀신으로도 떠돌아 댕겨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 겁을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온 그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도 보고 말도 하고,
몸뚱이를 가지고는 차웁고· 덥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도 알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맘대로 왔다 갔다 하고, 또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게 신통이 자재하고, 시간·
공간에 걸림이 없는 묘한 물건을 우리 모두 낱낱이 다 지니고 있고,
그놈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자체를 깨닫지를 못하고 계속 생사윤회를
할 수밖에는 없느냐?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 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하고,
그놈을 마음껏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삼천 년이 된 이 말세에 겨우 이 문제를
이제사 알고,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는 그러한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금생에라도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금생에마저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면, 무량 겁 미래
언제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이 법을 알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은 한없는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몸은 금생에 언젠가는 버리게 됩니다. 버리고 난 다음에
다시 또 육도의 어느 곳에 몸을 받아나게 됩니다마는, 금생에
일생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마지막에 숨 딱 거둘 때에도 참선하는
그 마음가짐, 그 화두 일념으로 딱 숨을 거 두게 되면, 내생에
금방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좀더 일찍 좀더 공부하기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훨씬 빨리 공부를 하여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도인들, 모든 성현들도 일생, 이생 닦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을 공부해 가지고 금생에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받아 태어나 가지고 일찍 공부를
성취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입니다.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 걸음만을 하는 것 같지마는 결국 깨달을 때에는
중생의 상태에서 성현의 상태로, 비약적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해놓으면 설사 금생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공부가 허사가 아니기 때문에, 올바르게 해 놓은 공부는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점진적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지 못한다고 조급한 생각을 낼 것도 없고,
금생에 나이가 먹도록 죽음에 이르도록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 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 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물(우리 밖의 모든 사물)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있고,
그놈의 부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삼라만상, 우주법계를
내가 운전하고, 내가 요리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밖의
물건에 의해서 내가 구속을 당하고 있고, 그 조종을 받고 있고,
그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인데… 주인이 시원찮고 정신을 못 채리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게 주인이
멸시를 당하고, 주인이 종노릇을 하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하!
그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대단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허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게 있는 것,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놈,
여러분이 듣고 있는 놈, 밥을 먹을 때는 먹고 있는 놈, 길을
걸어 갈 때는 바로 그 걸어가는 놈, 성날 때는 바로 그 성내는 놈,
그놈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날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울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차를 탈 때도· 앉었을 때도·
누웠을 때도, 바로 <그때 그때, 그 자리 그 자리>가 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는 장소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분위기가 필요하지마는, 이 공부는 때도 장소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퍼뜩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