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 기도성취의 원리

불광법회의 보살들은 얼굴이 밝다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사실 어둡기 때문에 밝으라고 구호를 외치고 소리를 높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오히려 원래 밝은 것이 생명의 본 모습이고, 참된 생명을 본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데서부터 지금도 원래 모습을 가지고 그 얼굴 그 모습을 간직하려 하니까 밝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는 만큼 더욱더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관련된 어두운 것들도 깨끗이 자취가 없어져서 정말 결코 어두울 수 없는 그러한 밝은 빛을 모두의 생각과 말과 행동 가운데서 그냥 수달처럼 뿌리고 있는 것이 우리 불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 우리 불자들이 가운데서 그러한 밝은 표정을 읽지 못했다고 그러면 내가 눈감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게까지 생각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누구든 사람을 만났을 때 언제나 밝은 미소와 긍정적인 말로 대하고 무엇이든 도와줄 것을 마음에 갖자는 것을 항상 외우고 그렇게 행합니다. 이것은 사실인즉 마땅히 있어야 할 우리 얼굴의 모습을 되뇌인 것이고 마땅히 우리들 자신이 빛나고 있는 본래의 생명의 모습을 눈여겨 보면서 되뇌이는 것입니다. 사실 반야의 눈에서 보면 찬란한 태양보다 밝은 것입니다.

태양의 밝음이 바로 누구에게서 오느냐 하면 나의 생명에서 온다고 할 정도로 태양의 밝음의 근원이 나의 생명이고 나의 생명의 밝음, 그것이 내 얼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타오르는 생명의 불길을 얼굴에 광명으로 나타낸다 하는 것이 반야를 배우는 사람들의 원 표정이라고 저는 읽고 있고 우리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누가 알아주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원래 나는 밝은 자입니다. 나의 생명은 죄도 아니요, 악도 아니요, 번뇌도 아니요, 업장도 아닙니다. 그 모두를 뛰어넘고 그 모두가 그림자 지울 수 없는 원래 밝음, 그 자체가 나의 생명의 원 모습인 까닭에 내 생명껏 밝은 이 표정을 갖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 가운데 명랑하게 빛나는 태양빛깔을 자신의 모습으로 간직합니다. 이런 점에서 반야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밝은 표정과 그 기쁜 얼굴이 항상 온 몸으로써 뿌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구를 대하더라도 참으로 밝은 기쁨, 흔쾌한 마음, 친절한 표정을 가지고 ‘무엇을 도와드릴까’하는 마음이 앞서야 복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원래 이렇게 밝은 빛은 나만 좋으라고 밝고, 내 발등만이 밝은 것이 아닙니다. 밝음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밖을 비춥니다. 항상 차별없이 비춥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불자들이 모두가 항상 지울 수 없는 밝은 얼굴과 기쁜 표정으로서 친절한 마음, 그리고 무엇인가 도와주고자 하는 참 따뜻한 마음으로써 항상 살아간다고 하는 것, 이것은 원래의 제 모습이고 반야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순도높은 반야의 얼굴, 불자의 얼굴들을 함께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법회에 나와 보신 분이거나 우리 불자들을 대하신 분 가운데서 다들 불자들의 얼굴이 밝고 명랑하고 친절하다고 하는 이런 점에서 반야공부를 다들 생활화하고 정말 온갖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난 참 빛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사실 이 점은 우리가 명념을 해서 몸이 괴롭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거나 어떤 장애가 오더라도 그것은 흘러가는 구름이며 잠시 나타나는 현상이고 실로 나의 생명은 결코 어두울 것이 없는 밝은 태양이 여기 빛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 모습이다 하는 확신을 가지고 서로가 밝게 비춰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 불자들의 기본적인 계명입니다. 만약 불자로서 짜증스런 일이 생기거나 그밖에 뜻대로 안되는 일이 생기거나 그랬다고 해서 웃음을 잃어버리거나, 친절을 잊어버리거나, 무엇인가 따뜻한 감정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집에 가서 풀어버리거나 가까운 사람한테 풍기거나 이렇게 해서 자기 해소를 하려고 하는 것은 불자로서 좀 더 반성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떻든지 우리 표정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거친 것을 몰아내고, 우리 마음 가운데서 또한 침울한 것을 몰아내고, 내 생명에 빛난 그대로를 간직해서 부처님의 공덕으로 우리 생활 속에서 책임지자는 것입니다.

나는 그 전부터 이러한 내용을 글로 크게 써서 불자들에게 나눠주고 책상머리나 방에 붙여놓고 시시로 그것을 접하면서 거울로 삼도록 하자고 말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반야를 바로 내 생명에서 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과 이론에서 배우지 않고 바로 나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보는 공부가 되어 우리의 생활 속에 바로 부처님의 공덕을 나타내고 부처님의 공덕으로 사는 그러한 공부여야 하겠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불자들 가운데 많은 분들은 각기 서원을 가지고 혼자 혹은 몇몇이 모여서 기도하러 다니는 것을 봅니다. 요즘은 법등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법등 가족 가운데 병이 있어서 병완쾌를 위할 때 그분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를 하고 한자리에서 못하면 제각기 매일 일과시간에 합니다. 한생각 깊은 속에 있다든가 금강경을 읽는다든가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읽는다든가 해서 제각기 부처님을 향해서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기운을 하나로 모아서 법등가족의 건강을, 법등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얘기를 퍽 많이 듣습니다.

실지로 그렇게 해서 의사가 완전히 포기해서 못 고친다고 하는 그런 병마저도 법등식구들이 기도해서 나은 것입니다. 나는 이 기도방법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개들 각자가 자기 기도는 많이들 합니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친구들끼리 즉 나는 친구를 위해서, 그 친구는 나를 위해서 서로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도 서로 이웃을 위해서 서로서로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더 밝고 큰 공덕이 거기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그 가운데는 자기에게 아집이 함께 있을 뿐입니다.

자기보다는 이웃을, 이웃에 대한 큰 마음을 발하면 발할수록 내 마음의 눈은 더욱 크게 열리고 부처님의 공덕의 물결은 더욱 거세서 복은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 신도님들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마는 나의 경우는 신도들의 부탁을 받고 기도하는 수가 많습니다. 칠성기도를 사십구일 하고, 금식기도를 삼칠일간 몇 번씩 하고 사십구일, 칠일기도도 몇 번씩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누가 하느냐 하면 제가 합니다. 기도의 소원발원은 전부 신도분들 잘 되게 해달라고 발원합니다. 기도의 힘이 누구냐하면 이쪽에 있습니다. 항간에는 이러한 기도가 사악적인 불교의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참으로 진실한 뜻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남을 위한 기도를 해서 나는 쭉정이밖에 돌아온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정진한 나를 다르게, 기도의 힘, 정진의 힘 그 자체가 바로 나를 통해서 내가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라고 하는 그것은 원래 나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참으로 자타가 없는, 정말 충만한 시민으로서의 마땅한 자세를 지켜가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기도의 부탁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계속하려 합니다.

이것은 저를 가르쳐주신 소천 노화상의 영향이 많습니다. 그 어른 말씀 가운데는 “기도를 하더라도 너 자신을 위한 것보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혹은 불법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나의 원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나는 모든 부처님의 원을 이루게 하는 것이로다.” 소천 노화상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까지는 안간다 하더라도 서로 가족을 위해서, 서로 친구를 위해서, 서로 이웃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한 자세가 참된 나의 성장이고 참된 나의 기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참된 기도가 성취되는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기도는 불가사의라는 것입니다.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원래 성질이 논리와 이론이 서지 않으면 한 치도 못 가는, 금방 죽을 일이라도 타협하지 않는 비교적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말과 이론을 떠난 진리 그 자체인 것입니다. 말과 이론은 보송보송한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불법은 불가사의입니다. 불가사의는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이 아니고 이론이 아니고 비유로 생각할 수가 없고 어떤 이론으로 짐작하거나 사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유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방법인 것입니다.

아무리 전부라고 그래도 전부라고 하는 그 정도에서 많다고 하는 그 정도에서 참으로 그것은 관념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경우를 무어라고 말로 표현한다 해도 부처님은 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솔직한 심정으로 말씀드리면 불가사의, 이 한마디로 끝입니다. 불가사의라는 것은 무한하다는 뜻입니다. 무한은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 이론에 매여서 이러한 논리 밑에 이렇게 된다는 논리에 매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일체 걸림이 없는 대자재 완성이 ‘불가사의’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을 한마디로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유, 생각, 이론으로 알려합니다. 논리로 따져서 ‘아, 그렇다. 그러면 그렇지.’ 혹은 논리로 따져서 ‘그것은 미신이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논리로 알고 있는 그런 구별 속에서 아는 부처님이 아닙니다. 참으로 전능적이며 전지적이고 절대적인 부처님, 결코 사유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명명해서 나는 ‘불가사의’라 그럽니다. 그런데 이 불가사의한 부처님, 말과 이론이 없이 무조건 챙기는 부처님, 자비라 하더라도 이유 없는 무조건의 이 부처님이 바로 우리들의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나의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입니다. 나의 생명 자체가 불가사의입니다.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무한한 위덕을 고스란히 그대로 받고 쓰고 있는 것이 나의 생명입니다.

부처님의 생명, 나의 생명이 따로 있지 아니하고 나의 존재 자체가 부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 존재가 사실 불가사의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불가사의냐 하면 아닙니다. 절대 합리주의입니다. 합리가 도달해야 비로소 온전하다 그럽니다. 인간을 합리라는 통 속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논리 속에 비쩍 마른 사람을 만들어서 곽 속에 집어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 부처님의 법은 불가사의입니다. 내 생명이 불가사의이며 내가 살고 있는 그 생명의 진리는 불가사의입니다. 그러하건만 우리는 불가사의한 그 도리를, 그 생명을 쓰고 살면서 논리에 매이고, 합리의 축적 속에서 매달리고 있습니다.

나는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성취에 대한 지대한 원리를 많이 봤습니다. 기도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하고 기도에 관한 얘기는 퍽 많이 하고 기도성취에 대한 법칙 같은 것을 생각하고 기도에 관한 것을 여러분께 챙겼습니다.

논리적인 수긍이 가야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했지만 내 속을 터놓고 말을 한다면 ‘불가사의’입니다. 불가사의 법은 불가사의에 있는 것이고, 절대의 법은 절대적인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해서 될까.’ ‘이것이 기도해서 될 수 있을까.’ 현재의 과학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는 ‘맞지 않는다. 하도 답답해서 기도를 해보는 것이지.’ 하는 것은 먼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렇게 먼 세계에 있지 않습니다. 불가사의, 불가사의인 까닭에, 생각할 수 없는 까닭에 우리의 논리한계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논리와 우리의 지식과 우리가 알 수 있는 어떠한 법칙으로도 더 이상 이룰 수 없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은 통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분들이 과학이니 지식이니 합리니 하는 이런 체제 가운데 빠져들어서 합리의 도구가 되고 논리의 도구가 되어가지고 이 불가사의법을 쓰지 못하고 그릇되게 얽매여서 오히려 고통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불가사의 법칙이 엄연한 것은 예를 들어서 남을 해치게 하는 기도라든가, 남이 잘 안 되게 하는 기도라든가, 자기가 게을러도 되는, 후퇴하는 기도, 문화의 진도를 역행하는, 인간적인 향상과 상반되는 이런 기도생활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마음 가운데 강한 분노나 질투를 대립 가운데 품고, 그렇게 해서 무엇인가 소망하는 그런 기도 가지고는 좀체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원래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덕성세계에서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빛이여, 들어올지어다. 음악이여, 내 귀를 울릴지어다.”하고 아무리 염한다 해봐야 눈을 감고 귀를 막고서는 그 소리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무진장한 불가사의한 그 흐름을, 그 광명을 자신의 가슴에 안고자 하면 마땅히 가슴을 확 열고 집착을 놓고 문을 활짝 열고 밝은 빛을 받아들일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光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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