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의 본뜻

사실 형상에 매여있는 생각이 쉬어버리면 우리가 보고 있는 감정,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것은 통하지가 않습니다.

일단 보는 것은 눈이 보는 것이 아니고 듣는 것은 귀가 듣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듣는 것인가. 만약 눈이 보고 귀가 듣는 것이라면 아마 송장도 보고 송장도 들을 것입니다.

『금강경강의』로 유명하신 소천 거사님이 당시 파주에 계실 때 일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시 고 안 계시지만 8·15해방 전 범부라는 스님이 그곳에 오셨더랍니다.

어느 거사에게 저 스님이 참 법력이 있고 장한 스님이라고 자랑했더니 그 거사가 자기 집사 람이 실실 앓고 있는데 불공을 좀 드려야겠다면서 떡을 해 가지고 와서 불공을 드리곤 했답 니다. 그래 스님은 부처님께 올린 떡은 잘 먹었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 었습니다. 며칠 있다 보니까 별안간 낯선 젊은 여인이 막 뛰어오더니 그 암자에 와 가지고 “내가 지장 보살님이다.”하고 소리를 치고 돌아다니는데 그 뒤에 그 거사님은 따라오고 해서 그 스님도 소천 거사님도 거기 앉아서 참 답답하더랍니다. 그 여인을 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마음 속으로 한 마디를 읊었답니다. 한 마디를 읊으니까 “피” 하더랍 니다. 그 표정이 “나도 그쯤은 안다.”며 비웃는 것입니다. 그 다음 무슨 진언을 읊어도 “피” 그러더랍니다.

“보자 하니까 당신이 지장보살이라 하는데….”

“아 그렇구 말구.”

“지장보살이면 뭘 다 알겠구나.”

“아무렴 다 알구 말구.”

“그럼 나하고 법담을 하자. 도를 가지고 문답을 하자.”

“그럼 해봅시다.”

“네가 지장보살이라 하니 지장보살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목구멍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벽력같이 “송장도 목구멍이 있는데” 하니까 막힌 것이 확 떨어져버 린 것입니다.

막혀서 펄펄 뛰던 여인이 별안간에 확 고꾸라지더니 한참 만에야 일어나 정신이 드는지 부끄러워서 정신없이 삼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증세가 나았다고 합니다.
원래 이 귀니, 눈이니, 목구멍이니 하는 이것들은 도구입니다. 경에도 그런 얘기가 많이 나 옵니다만 나팔에서 소리가 난다고 해서 나팔을 발길로 차면서 “소리 나라, 소리 나라” 한다 고 해서 소리가 나옵니까. 역시 귀니 눈이니 목구멍이니 하는 이 기관을 부리는 데가 있습 니다. 여기에 눈뜨면 산이 산이 아니요, 물이 물이 아닌 것입니다. 마침내 보는 것도 눈이 아니요, 듣는 것도 귀가 아닙니다. 오고가는 것도 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불광형제들은 제가 영가를 위해서 하는 법문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영가한테 주로 하는 법문은 이렇게 형상에 매이지 않는, 일찍이 죽지도 아니하고 죽을 수도 없는 이 물건에 집착을 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과 고통과 원망과 그런 결박되 어있는 상태의 감정을 벗어나서 참으로 살아있는 자기 본래생명의 실상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 도리를 알고, 듣는 것이 귀가 아니고, 말하는 것이 입이 나이고, 또한 소리가 나는 것이 목구멍이 아니고, 보는 것이 눈이 아닙니다. 이렇게 상(相)과 상을 여의고 보면 거기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철 종정스님이 말씀하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는 말은 사실 이 자리에서 비로소 나온 말입니다. 이것은 모두 상을 여읜 자리에서 말한 것이며, 일체 막힘이 없는 데서 말 한 것입니다.
『원각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변허공, 끝없는 이 허공이 다 무엇인가. 우리들의 이 몸뚱이는 이 땅 위에 있고, 이 땅은 허공 가운데 지구이며, 이 지구는 태양계 가운데 있고, 태양계 내지 모든 우주의 건립은 허 공 가운데 들어 있다. 그럼 제일 큰 것이 무엇인가 하면 허공이다. 그러면 이 허공은 어디서 나왔느냐. 허공이야말로 각(覺), 깨달음이라는 한 물건의 표현이다.”

말로 표현하기 참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정말 죄를 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말을 하는 것입니다. 허공은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입니 다. 허공이야말로 깨달음의 한 물건, 이 깨달음, 한 물건, 이것이 필경 무변허공, 거기서 나 오는 것입니다. 이 허공이 그렇거늘 허공 안에 있는 우주며 삼라만상이며 두두물물, 천차만 별, 이것이 다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그 물건 밖에 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할아버지가 박씨면 손자 만대 천대가 다 박씨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입니다. 이 법문 을 뜻을 여기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래서 막힘이 없고, 일체에 융합한, 일체에 통하는, 일체에 대립이 없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운문 스님께 어느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입니다. 조금도 거짓말이 아닙니다. 괜히 의심이 나게 만들어서 마음을 정신통일시켜서 도를 깨치게 하려고 방편으로 만든 소리다라고 말합니다만 천만에, 아닙 니다.

화두가 무엇인가. 화두의 핵심이 무엇인가. 이 각(覺), 깨달음, 이 진리, 이 한 물건을 온전히 드러내 놓은 것이 ‘할’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입장이 아니면 그것을 못 본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화두 그대로, 깨달음 진리법 그대로 온전히 내보인 것입니다.

지금 글귀를 보면 사실 그대로의 설파인데 가장 명백하게 “어떤 것이 꿀이냐” 했을 때 꿀을 설명할 것 없이 입 속에 확 넣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물이냐 했을 때 설명할 것 없이 물을 입에다 확 부어주는 것입니다. 조금도 거짓 없이 실물을 금방 내보인 것이 화두입니다. 마른 똥막대기라는 화두도 사실인즉은 별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것을 너무 설파해서 허물이 된 것 같습니다만는 소동파의 시가 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이 부처님의 설법이요, 산색이 어찌 정법신이 아니랴.”

이 경계들은 상(相)이 상이 아닌 자리에 앉으니까 나오는 것입니다. 언젠가 종정스님 인터뷰 에서 “시청자와 불자들에게 한마디 법문을 해주십시오.”하고 마이크를 대니까 “내 말에 속지 말라.” 하셨습니다.

법문이라는 것,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과 이론에 걸리고, 그렇게 걸리는 한은 법문을 놓치는 것입니다.

“찰간찰.”

이 한 마디. 바로 말과 문자이론에 매이지 않고 참 물건을 보라는 소리, 그것을 벽두에 제시해준 것이라고 봤습니다.

“평상시에 어떻게 지내십니까.”

“밥먹고 지낸다.”

“산을 걸어가시면서는 어떤 마음으로 걸어가십니까.”

“아무 생각 없다. 발 닿는 대로 딛는다.”

“이 계절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십니까.”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다.”

이 말들, 앞의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금강경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다. 이렇게 현상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알맹이에 들어가서 비로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고 뛰어나왔을 때 이 말이 때묻지 아니하는 진국의 말인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새가 재잘거리니까 기자가 묻기를 “저 새가 뭐라고 합니까.” 하자 스님께서 대답하시기를 ” 남들 속이지 마라.”

이 말씀은 사실 한 단 내려와서 자기 경계를 겸허하게 자신의 좌우명 같은 것은 그때 그때 내비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서 법문 가운데 이르시기를,

“밤에도 항상 밝은 발 밖이요
풍월이 낮과 같고
마른 나무가 의지한 바위
바위 앞은 화훼가 장승이로다.”

발을 쳐놔도 밤에는 항상 밝은 발 밖이요, 경치가 대낮과 같다. 그러니까 여기는 발이 쳐져 있고 어두운 곳이며 풍월이 낮과 같다는 말입니다.

“마른 나무가 의지한 바위
바위 앞은 화훼가 장승이로다.”

바위가 있는데 나무가 말라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 앞에 꽃이 피고 꽃나무가 그냥 기나 긴 봄을 노래하고, 꽃은 피고 새는 우거지고, 이렇게 봄이 번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을 해놓으면 우리 불자들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보지 아니하고 말귀에 따라서 이해해서 당장 도인이 되었다고 춤추고 나갈까봐 겁이 나서 “밤에 도 항상 밝은 발 밖이요.”하신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발 밖인데 항상 밝아 밤에 도 밝고 낮에도 밝아 밤낮이 없는 것, 이것은 어떤 경지를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 했습니다. 붜가 허망한가. 발이 뭔가 하는 것입니다. ‘고목이 의지 한 바위.’ 이것은 바로 다 쉰 자리입니다. 무엇이든 형상에 걸려질 때는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고,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얻을 것도 있고, 잃을 것도 있고, 생로도 있고, 얻은 불국도 있고, 내버려야 할 번뇌망상도 있고 하는 온갖 것이 있겠지만 그러한 범소유상, 상을 다 떨어버린 실체 그 진 바탕에는 한 물건이 없는 것입니다.

한 물건이 없다 하는 말은 무엇인가. 대립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립이 없다는 말은 무엇인 가. 없다 하라는 뜻입니다. 이 경계야말로 화훼장승이로다. 도를 깨쳤다고 하는 것은 싸늘한 바람이 쌩쌩 돌고 찬물 같은 것이 아니라 꽃은 피고, “밤에도 항상 밝은 발 밖이요, 풍월은 낮과 같고 고목이 의지한 바위 앞이여 화훼가 장승이로다.”

이것은 바로 노화상이 가장 적절하게 본분지평소식을 말한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은 “무상정각(無上正覺)은 안리형극(眼裏荊棘)이요.”

위없는 깨달음, 이 도를 깨달았다는 것은 눈 가운데 꽂힌 가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는 다는 것이 깨달으면 깨달았지 왜 깨달은 것이 눈에 있는 가시라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여열반, 열반에 든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깨달았다는 것, 이 무상정각이 있는 한 그 것은 훤히 밝아서 온 천지가 보이는 이 눈을 찌르는 것입니다.

다시 “대비보살은 지옥단계로다.” 대자대비 중생을 제도하는 그 보살들은 지옥의 찌꺼기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 다 제도하고 마침내 거기 남아있을 지옥 찌꺼기가 대비보살입니다.

어떻게 대비보살이 되는가. 중생이 있고, 제도할 법이 있고, 제도할 대상이 있고, 제도할 중 생이 있고, 제도할 자기가 있는, 이러한 대비보살은 끝끝내 지옥이 없어지도록 혼자 남는 것 입니다.
“백학은 고비하고 적토는 표주로다.
누런 꾀꼬리는 노래를 부르고
호접(범나비)은 난무로다.”
흰 학은 높이 날고 산토끼는 빨리 달리더라.
누런 꾀꼬리는 노래 부르고 호접은 춤을 추더라.

“하하”하고 웃고는 “알겠느냐.”

여기까지가 일단의 대중을 향한 법문입니다. 사실 이 노장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알겠느냐” 물어놓고는 당신이 스스로 송을 하시기를 “야고 둥둥 화해태평이요.”

들에서 노는 한가로운 사람들이 북을 둥둥 치고 놀다가 천하가 태평이라고 즐겁게 천하를 축하하니 “구구는 원래 팔십일이라.”

그것은 다 아는 얘기지요. 이것이 당신의 마음 얘기입니다. 그저 형상에 매여서 거기 붙잡혀 있으니까 여기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씀해놓고 “내 법문이 어렵다고 그러지마는 어려울 게 하나도 없다. 사실대로 말 한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법문 아닌 법문을 해주시겠다고 하시며 불교의 골수를 말씀하셨습니다.

“일체 법이 나지 아니하고 일체 법이 멸하지 아니하니 일체 만법이 본래 나지 아니하고 일체 만법이 멸하지 아니하니 만약 명히 이와 같이만 알면 제불이 한 물건이라 모든 부처님이 항상 들어가 있다.”

일체 법이 나지 아니하고 일체 법이 멸하지 아니하였으니 만약 이것은 알 것 같으면 처처에 부처가 뛰논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금강경의 이 대문을 통해서 정 말 일체에 막힘이 없고 일체에 대립이 없고 모두가 구족원만해서 처처에 자재현시하는 이 도리를 우리 현대인들은 배워야겠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가 우리가 집착하고 견해가 잘못되고 온갖 감정을 무기로 해서 매달려 있어서 그렇지 원래 우리가 있는 땅, 그것만큼은 모든 부처님이 항상 현존해 있는 그 경계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눈을 뜨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마음의 눈을 뜨지 않아도 원래 바로 그 곁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진리를 깨닫든 못 깨닫든 그것은 문제 밖입니 다. 안 깨달아도 이 진리는 내 생명인 것이며, 깨달아도 조금도 더도 아니고 그 집이 그것인 것을 보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진리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며, 환경과 미움을 가지고 혹은 증오와 분한 생각을 가지 고, 이러한 마음의 형태를 마음에 가지고 있고 서로 창을 두고 살면 진리의 물결은 내게 오 지 아니하고 어둠만이 내 앞에 다가옵니다.

깨달은 것도 깨달았다고 집착하고 있으면 눈 안의 가시인데 그밖에 말할 것이 있겠는가. 우 리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선 바르게 믿고 내 생명 깊이 있는 진리로 고 쳐 내 마음에 진리의 평화가, 내 마음에 진리의 기쁨이, 내 마음에 진리의 너그러움이 항상 함께하여 먼저 내 마음에 진리가 물결쳐오고, 내 몸 안에 진리가 충만했을 때 나의 환경과 나의 가정 나의 활동하는 무대가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진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진리를 뿌리는 사람, 빛을 뿌리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光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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