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을 놓아라

얼마 전에 어느 책에서 보니까 당뇨병 증상을 나타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삼십 분에 한 번씩 소변을 봐야 하고 갈증이 나서 물을 연달아 먹어야 하는 증세입니다.

여성이 이럴 경우에는 대개 아기를 못 갖는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분들은 월경에 배란이 없 어 무배란성 월경이라는 증세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런 증세의 병명을 받았지만 부모에게 말을 못했어요.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서 마침내 친정어머니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친정어머니는 이거 안 되겠다 하시며 “세간법에 없는 것은 부처님께 찾으면 된다.”고 하 시고는 모녀가 함께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기를 가져야겠다. 건강해야겠다’ 하는 이 생각 은 신성한 생각이고 부처님에 의해서 마땅히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이 사람은 결혼 후 5년 만에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의사는 “이러한 병에는 아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낳을 수 없는 수가 있다. 가능한 중절했 으면 좋겠다.” 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기도하는 분들인 까닭에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기를 갖게 된 것도 다 부 처님의 은혜다. 부처님의 원력, 부처님의 섭수위신력으로 가진 아기다. 부처님이 주신 아기니까 낳 는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계속해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참으로 건강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병원 임상회에 보고가 되고 의학회에 보고까지 되는 사례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 니다.

세간에서 보면 그저 우연이겠지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대개 논리적인 사고로 수긍할 수 없 는 사건들이 벌어지면 우연이라는 말들을 씁니다. 그러나 우연이라도 좋습니다. 우리들의 한계적 인 사유가 우연이라도 좋으나 그러한 우연이 그러한 사람을 위해서 분명히 나올 수 있으려면 그 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 부처님 법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와 합리를 초월한 것입니다. 깊은 신뢰를 가지고 부처님의 참빛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 어떤 분은 무모하 게 미신적인 말을 한다고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도 무모하고 미신적인 것에 가장 대적해왔던 사람 인데 지금은 어찌 보면 무모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원래 우리 생명의 본모습이 그런 것입니다. 세간적인 눈에서 벗어난 깊은 지혜에서 볼 때 존재의 참모습을 보고 존재의 참모습을 그려보면 우리의 삶은 편안합니다.

불법의 본성은 불생불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형상에 매여가지고는 모릅니다. 금강경 말씀 에 부처님께서 “형상으로 부처를 보겠느냐” 했을 때 수보리 존자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형상으 로는 부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신 것처럼 일체에 있어 형상에 매달려 있는 한 나는 것도 있 고, 멸하는 것도 있습니다.

형상에 내가 이미 없는 윤리에서 모든 부처님이 일체 국토에 그냥 들어가 있고 모든 사람, 모든 가정, 우리가 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부처님이어서 내 곁에 와서 광명을 내고 있다는 사 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형상에 매달리고 형상에 집착해 있는 한은 부처님을 보지 못합 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형상있는 모든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줄 알고 집착을 놓았을 때 바로 허망한 형 상 그 자체가 사실인즉은 제불(諸佛)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들의 본심이 무엇이냐.’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들이 가지는 이 육체적인 형상, 물질적인 형상, 이것은 지금 맛보는 것처럼 형상 있는 것은 허망한 것이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있는 듯하지 만 실로는 없는 것이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것이고,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해도 실체가 없습 니다.

언젠가 조용명 스님이 방한암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불광지(1980년 5월-9월호)에 쓰신 적이 있습 니다. ‘노사의 운수시절’이라는 난에 ‘우리 스님 한암 스님’ 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한암 스님은 신도분들이 와서 불명을 청하고 법문을 청할 때는 불명을 써주시고 계문을 써주시는데 항상 이렇게 써주셨습니다.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 즉견노사나(卽見盧舍那)

일체법이 자성이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법성을 알 것 같으면 일체처에서 부처님을 본다. 부처님 의 원만신을 본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관념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미혹의 세계가 생기고 결백의 세계가 생기고 고난의 세계가 생기지만 공(空)입니다. 없습니다. 자성무성입니다. 집착을 다 놓아 버렸을 때 법칙을 봅니다. 청정법칙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암 스님이 신도분들에게 계명을 써주시던 경우의 계문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일단은 법신이라는 것은 형상을 여의는 데서 보는 것입 니다. 그래서 우리의 법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고 묻게 되면 법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은 법신도 하나의 상이 되기 때문에 법신이 될 수가 없습니다.

법신은 따로 말을 하고 생각하고 논리적인 구조 가운데 지견을 따로 가지고 말을 한다면 역시 그것은 법신이 법신이 아니고 말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일단 형상을 여읜 것이라고 하는 표현을 드릴 수밖에 없고 법신이라는 것을 그렇게밖 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기 도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불가사의 것을 쓰고 있습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법신입니다. 내 주인은 법신입니다. 생각할 수 없는 법신입니다. 그래서 완전구족한 법신덩 어리인 불가사의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쓰는데 어떻게 쓰느냐. 내가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님의 공덕을, 부처님의 위신력을, 부처님의 청정성을, 부처님의 자비를 온전히 갖춘 말할 수 없는 무한대한 것을 고스란히 갖춘 이 법신, 이것을 내 생명뿌리 가운데 몰래 감춰 가지고 있어 이것을 쓰는 것입니다.

마음을 일으키는데 착한 마음을 일으키면 이 몸뚱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형상이 좋아지는 것입 니다. 그리고 악한 마음을 일으키면 이 색신, 이 몸뚱이가 악한 것, 즉 거칠은 것을 받습니다. 그 런데 우리는 법신은 못 봅니다. 마음 쓰는 것도 못 봅니다. 나라고 하는 겉껍데기만 보는 것입니다. 겉껍데기 이 색신, 이 형상, 내가 사는 이 세계, 나의 생활주변이 거칠으냐 좋으냐 이것만 보 고 앉았지 그것이 나타나기 전에 무엇이 있었느냐는 것은 생각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 복을 탈 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박복한가.’ 기껏해야 그 정도이 지 참으로 누가 복을 주고 복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만약 조물주가 있어서 애를 먹인다면 조물주 규탄대회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조물주가 자기 자신 가운데 들어있을 바에는 스스로 자기가 조물주를 대접해 착한 조물주로, 어진 조물주 로, 참으로 평화스러운 조물주로 되돌려서 나의 생명의 터전인 이 땅이, 이 생명 자체가 참으로 평화스럽고, 참으로 따뜻하고, 참으로 빛나게 자기를 다시 개조할 수 있는 조물주로 단련을 해야 합니다.

사실인즉 우리들은 진(眞)이라는 법신이 나의 본생명입니다. 그 법신은 생각을 끊음으로써 그 힘 을 발휘합니다. 법이 있는데 착한 마음을 일으키면 그 핵심이 몸뚱이와 이 상황세계가 착하고 원 만하고 조화를 이룰 환경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거칠고 악한 마음을 일으키면 악한 환경에 떨어지 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법신도 멀어지고 마음도 멀어집니다. 이 몸뚱이가 떨어지는 이 세계만 보 기 때문에 결국 끝을 모르는 것이며, 이래야 되는가 저래야 되는가 하고 망설이게 됩니다.

장님이 서로 지나가다가 싸움이 나서 서로 때리다가 때릴 사람은 못 때리고 옆에 다른 사람을 때 리기 때문에 왜 날 치느냐 하면서 또 서로 싸운다고 합니다.

해방 직후에 남산 밑에 장님분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동네에서 어떤 사람이 차사고 가 났답니다. 장님 양반이 그를 응징하기 위해 때린다고 때린 것이 하필 다른 사람을 때리게 되어 서 왜 치느냐 하며 서로 치고,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치고, 저 사람이 또 저 사람을 치고 옥신각신 해서 서로 눈을 감은 분들이 작대기를 갖고 나와서 남산 입구길에서 대전쟁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이 이야기는 세상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와 흡사합니다. 이 육체, 그것에만 매달려 가 지고 서로 원인을 잘못 보고 그야말로 이웃사람을 치고 앞사람을 받고 야단을 해서 엉뚱한 데로 파벌을 일으켜서 원인 모를 전쟁, 끝모를 전쟁이 계속해서 끊일 사이없이 벌어지는 것이며, 말로 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전쟁은 끊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인을 모르고 이렇게 미혹한 중생들 이 움직이는 세계가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법신에 눈뜨지 못하고 겉 형상에 나타난 것에 집착해서 끝없는 맹인증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제일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이러한 형상에 살고 물질에 살고 육체에 사는 것,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간에 살고 육체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세간에 살고, 육 체로 사는 집착, 그것밖에 다시 없는 집착, 이것을 쉬면 육체에 머물러 살고, 이 세계에 머물러 살면서도 욕진은 끊은 것입니다.

光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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