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의 청정자성을 생활 가운데 그대로 쓰는 바라밀의 수행과 금강경이 어떠한 관계 가 있는지 짚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불광의 가장 특정적인 것은 반야입니다. 반야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우리의 머리로 짜서 얻어지는 지혜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 깊이에 있는 부처님의 광명지혜, 부처님의 광명이 빛나는 지혜, 말하자면 우리 생명의 참 곳에서 나오는 지혜를 반야라고 합니다. 반야지혜에서 보는 바에 따라서 부처님의 크신 지혜의 위신력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생명인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범부로서 고난에 있고, 일상생활에 갇혀있는 듯 싶다 할지라도 지혜의 눈으로 비쳐볼 때는 그것은 뜬구름이고 흘러가는 과정이고, 몽환이고, 실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신력, 진리의 대광명, 이것이 바로 나의 본 모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자기를 보는 눈입 니다.
또 우리의 환경, 즉 가정환경이라든가 사회환경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악이 충만하고 서로 대립하고 싸워야 할 사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는 서로 협동하고 서로 힘껏 주면서 같은 진리의 길을 가며, 함께 성장하는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지혜의 눈으로 비춰볼 때 모두가 진리 덩어리뿐이고, 지혜의 표현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신성하고 높은 경지를 갖게 되고, 가정에 대해서도 지혜의 눈으로 봅니다. 부처님의 크신 은혜가 가정에 부어져서 우리 부모님의 부처님의 은혜로 가득하시고, 우리 형제가 부처님의 은혜로 가득하고, 우리 부부가 부처님의 은혜로 상면시키기 위해서 만났다고 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회는 악이 충만한 사회가 아닙니다. 이 사회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은 부처님의 크신 위신력을 가지고 그 위신력의 지혜의 빛을 여지없이 서로 드러내서 이 땅에 불국토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크게 긍정하고 크게 믿고 돕고 사는 그런 미덕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되도록 그런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야에서 사는 사람은 그 사람 마음이 다릅니다. 이러한 사람은 대립을 보지 않습니다. 모두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결코 어떠한 경우에도 대립을 통해서 나타나는 미움이라든가 갈등을 두지 않으며, 어떠한 이유에도 미움을 두지 않습니다. 미움은 새로운 미움과 새로운 고난을 가져오게 만들고 모든 일에있어서 장애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참 부처님의 크신 공덕, 크신 위신력, 이것이 나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대로 순수하게 받아쓰지 아니하고 어긋나는 방향으로 쓴다고 한다면 어긋나는 결과밖에 나올 수 없습 니다. 내 생명이 바라밀, 부처님무량공덕생명, 모두가 따뜻한 한 생명이기에 미워할 것이 없고, 서로 받들고 존경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받들고 존경하고 감사하면 나에게서 그 진리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받들고 섬기고 감사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서로 대립하고 투쟁한다면 진리와 자기 사이는 거리가 생기고 자기는 바로 진리에 살면서도 진리를 못 보고 어두운 데서 어두운 결과를 보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금강경에 아주 자세하게 설해져 있습니다.
제가 선방에서 처음 참선하는데 어떤 분이 금강경 사구게를 말해 주었습니다. 금강경이라는 이름이 신기해서 금강경을 가까이 하는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도무지 금강경이 뭐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그 당시에는 철학을 좋아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것이 불교 최상의 철학이다.” 이 정도로 이해가 갔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진리가 있겠지 하면서 금강경을 읽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금강경은 우리 생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참된 나의 생명, 내게 와 있는 부처님의 참공덕 세계, 그것이 내 생명 속에 있는 나의 본모습을 때묻지 아니하고 어디 결박되지 아니하고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금강경은 사실인즉 부처님의 말씀과 또 수보리 존자의 증언과 그 사이에서 오는 어떤 논리적인 것, 혹은 그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는 불교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있는 진리생명을 보다 순화하고 내 생명이 참으로 순화된 대로 살고 있는가를 항상 거울로 비춰봐서 잘못 되고 있는 부분을 하나하나 제거해서 바로잡아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 있는 바라밀공덕을 닦는 경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금강경은 이 말씀이 나 자신의 문제, 나 자신의 생명의 빛을 기르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가장 밑뿌리에 근원적인 말씀을 주안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기가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내 생명의 길을 여는 무진장의 힘이 여기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가지시고, 문자에 걸려서 문자의 의미에만 매달리지 않고 “참으로 이 뜻을 알아지이다.”하는 마음으로 이 공부를 계속해가면 좋겠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사오니 어떻게 응당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로리까?”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일상생활 중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주시고, 한없는 부촉을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지혜의 눈이 열려서 알아낸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놀라운 자기발견을 말씀드리고 나서 부처님의 그러한 크신 부촉을 받고, 크신 의미를 받아서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을까”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야말로 금강경 전부에 대한 말씀의 시작이고 여기서부터 부처님의 말씀이 풀려갑니다. 어떤 학자들은 금강경의 질문이 일흔일곱 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흔일곱 개의 의심을 풀어나가는 것은 비교적 여기서부터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 생활 상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어떻게 드러내서 쓸 것인가. 말하자면 육체로 살고, 못난 자기로 살고, 그릇된 습성, 그릇된 지식으로 싸여진 자기로 살고 있는 이런 범부생활에서 벗어나서 자기에게 깃든 참된 진리의 생명을 어떻게 내어쓰며 살 것인가. 사회생활 가운데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아니면 나 개인이 어떻게 내어써야 바르게 생명의 빛을 쓰는 것이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나오기 전에는 “부처님이 이렇게 큰 은혜 주시고 큰 부처님이 되십니다”하고 수보리가 부처님께 찬탄을 하니까 “옳다. 네가 잘 봤다. 사실 그랬느니라. 내가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해서(이 호념했다 함은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말씀하심) 또 부촉을 했느니라” 이렇게 부처님이 수보리가 본 것에 대해서 인정을 하시면서 챙겨주십니다.
그 동안도 여러 차례 해왔지만 여기에서 잠깐 보살에 대해서 한말씀 드리고 지나가야 하겠습니다.
보살은 아시다시피 보리살타, 범어로는 보디사트바인데 보리는 깨달음입니다. 사트바는 유정, 중생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합해보면 깨달은 유정, 깨달은 중생의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원래의 의미는 깨달음을 본질로 하는 사람, 깨달음을 핵심으로 하는 범부, 이런 의미가 됩니다. 보살이라 하면 바로 빛나는 존재를 뜻합니다.그 자신에게 깨달음이라는 최상의 진리를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겉은 범부로 보이지만 실로는 깨달음이라는 밝은 진리가 그 생명의 원 모습입니다.
그 다음 보살이라고 하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사람’ 이런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보디사트바라는 말 가운데는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보디사트바는 끝까지 보디사트바입니다. 저는 그 전에 반야심경을 공부하면서 “보살은 빛을 뿌리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만 이것은 보디사트바에서 나온 말입니다.
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인행시 수행과정에 있던 시절을 보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하신 후를 부처님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기원해서 성불을 향해 발심해서 수행 중에 있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살은 보살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본성이 불성이라고 하는 확신, 깨달음이 자기본성이라는 확신, 이것이 보살입니다.
저는 불광보살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내가 불자다”하는 불자다운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불자냐” 이것은 나의 본성이 불성인 까닭에 처처에 “내가 불자다”하는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말을 법회 때마다 해 왔습니다.
첫째, 불성이 바로 자기 본 능력이라는 것이 보살의 근본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성불하는 것입니다. 성불로 나아가는 자, 그는 불성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불성을 끊임없이 친근하고, 불성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수순하고, 불성을 끊임없이 회향해서 마침내는 불성을 결실해서 완전한 구체적인 자기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자기 복귀가 바로 성불입니다.
그러니까 보살은 이와 같이 해서 큰 깨달음을 자기 본질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불자들은 무두 보살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믿음, 자기에 대한 확신, 불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 이런 것을 통해서 자기를 바로 세웁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회향을 통 해서, 모든 생활을 통해서 바로 자기의 완전한 기로나 완전한 적성을 이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다 포용시킵니다. 이렇게 나타나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완성과 불국토의 완성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불국토를 완성한다고 하는 것을 미래에 가서, 혹은 극락에나 가서 할까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인즉 바로 우리 생활, 우리의 가정 가운데 생활 순간순간에 그런 것이 있는 것 입니다. 우리의 가정 가운데서 평화를 가져 온다든가, 친구 가운데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우정을 가질 수 있다든가 하는 등 자신에게 있는 힘을 조금이라도 개발해서 모두 함께 있는 방향에서 쓴다든가 하는 이런 하나하나가 바로 보살도를 닦는 것입니다.
보살도를 이왕 같이 닦을 때 불성이라는 자기 본성 가운데 있는 부처님의 공덕이 자기의 마음, 생활하는 그 환경에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정은 평화와 번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생명의 참 빛을 구김 없이 내어 쓰도록 자기 확인을 해가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이렇게 밝게 살고 있는가. 과연 이렇게 모두와 함께 따뜻하게 살고 있는 것인가. 과연 막힘없이 모두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불광가족들은 법등일송을 읽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비춰봅니다. 자기 자신을 비춰봄으로써 자기에게 명랑한 밝은 빛이 되어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과 같이 부처님과 차이가 없는 위신력을 갖추신 그런 성자만이 아니라 우리 한 사 람 한 사람이 이와 같은 큰지혜 공덕을 그 가슴 속에, 그 생명 속에 원래부터 가지고 생활 해 나가는 것이 보살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완성과 자기 국토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완성은 깨달음 하나하나를 바르게 세워가는 것이고, 국토완성이라는 것은 나의 가정과 나의 생활과 나의 주변 모두를 진리 그대로 표현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살은 모든 이들을 위해 마음을 쓰기 때문에 대자비행이 나오는 것이고, 부처님의 신력을 쓰기 때문에 용맹력이 나오고, 불퇴전의 힘이 나온다고 하는 것이고, 또 그 생명의 바닥이 부처님의 공덕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까닭에 거기에 끝없는 희망과 끝없는 영광이 항상 함께 있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