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는 제불(諸佛)의 어머니

그동안 여러차례 말을 했습니다만, 저도 여러 훌륭한 학자, 불교를 본업으로 학문을 본업으로 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보고 그런 분들께 배우는 것을 본업으로 하시는 분들과 논문도 많이 쓴 사람들을 가끔 만나봅니다.

그런데 만나보면 그 수많은 교리와 교학 체계가 이론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론으로는 내 생명의 것으로서 그것을 평가 못합니다.

내 생명으로 이해를 안하고 내 생명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이 진리를 내 생명으로 보는 것, 이것이 아마 불광가족의 특징일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교리로 배우고 이론으로 배우고 지식으로 배우지만 내 생명으로 배운다는 것이 불광가족의 특징이 될 것이고 저도 몽땅 그것뿐입니다.

부처님은 내 생명의 빛을 보여 준 것뿐이지 이론과 지식과 철학을 가르친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덕을 말하고 사회적인 평화를 말해주는 그 모두는 자기 생명의 율동, 생명의 빛, 생명 자체의 상호작용, 그 도리를 말해서 결과적으로 평화가 오고 결과적으로 창조가 오고 결과적으로 융화가 오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열반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주체적인 열반세계로 볼 때에는 세계는 참 불국토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송하는 보현행자의 서원 서분이 주체적인 열반으로 나갔을 때 비로소 이 몸은 끝없는 부처님의 위신력과 그 공덕이 흐르는 것입니다. 이 국토, 이 세계, 나의 가족, 나의 가정 모두가 부처님의 끝없는 은혜가 거기 주어져 있습니다. 이 땅에 나기전 원래부터 나는 축복받은 자입니다. 원래부터 생사를 뛰어넘은 자인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면 이 세상을 살더라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희망으로 살고 무슨일이든지 나의 창조적인 주체자는 바로 나고, 나의 의지에 의해 이 세계는 만들어진다는 적극적인 생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서지 못하면 겉껍데기에 매달려 가지고 허무한 것이 불법인 줄 알고, 무상을 불법인 줄 알고, 이 세상은 고(苦)다. 이 세상은 다 더러운 것이다, 이렇게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것이 불교로 알기 쉬운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만약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것 이것이 불법이라고 아는 사람은 패가망신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사상이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 들어서 아무런 창의적인 힘이 나오지 않고 사는 보람이 없습니다. 사는 보람이 없기 때문에 기껏해야 그때그때 자기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극을 구하거나 변화를 구하거나 늘어지게 자고 나서 먹고 마시고 뛰든지 아니면 비관적으로 세상을 봐서 희망없는 넋빠진 생활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쪽의 적극적인 측면, 주체적인 열반세계에서 봤을 때 이 사람이야말로 태양같은 사람입니다. 진리광명을 가지고 나를 창조합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창조해 가고 끊임없이 나의 가정을 밝은 빛 행복으로 창조해 가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중심이 바로 나다 하는 입장에 서서 바로 이 세계와 이 국토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평화도 불행도 남이 만들어 줘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이익됨에 의해서 나의 한 생각 한 깨달음과 나의 행동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하는 주체적인 책임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론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사실 그대로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체적인 권능을 잘못 행사해서 지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 지옥일 뿐 아니라 딴 사람까지도 그런 불행으로 몰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밝게 사는 사람이면 자신이 밝을 뿐 아니라 자기 가정이 행복하고 밝고 또 자기 직장과 자기가 속한 사회, 자기가 살고 있는 국토에 밝은 빛을 뿌리고 따뜻함을 채우고 창조를 가져오는 정말 빛을 뿌리는 자, 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말이 아기가 이유없이 자꾸 아프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서도 못 고친다고 합니다. 의사들의 말로는 신경성이라고 하고 자율신경 부조증이라고 합니다. 아기가 제 때에 똥을 눌 때 똥을 누어야 하는데 못 누고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딸은 밤만 되면 오줌을 계속 싸는 야뇨증으로 소금 받으러 보내 보고 볼기를 쳐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 불광 가족들은 어지간히 짐작을 할 것입니다마는 이런 건 전부 가정이라 하는 분위기 가운데서 그런 것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아기가 따로 병을 만들어 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 자율신경 부조증이 되는가 말입니다.

우리의 자율신경은 내가 무슨 마음을 먹지 않아도 저절로 소화가 되도록 위장을 움직이고 흡수를 하고 심장이 뛰게 하고 호르몬은 제대로 나와서 조정을 하고, 배설할 땐 배설을 하고 살균작용을 제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율신경이 스스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제대로 안되는가. 비록 아들, 딸 이렇게 구분이 있지만 사실은 그 하나의 생명이 함께 하고 있는 가정, 말하자면 지금 우리 생명의 깊은 곳은 본래 하나입니다. 깊은 생명의 바탕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는데 하나의 집안, 하나의 환경, 하나의 온실을 유지하고 있는 중심인데 그 두분 가운데서 끊임없이 흙탕물을 만들어 냅니다. 말하자면 불화, 아버지 어머니의 대립, 이 정신상의 불화와 마찰이 결국 자기 가정이라는 환경을 흐려 놓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기의 심층의식 가운데 작용하여 그러한 병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병을 고치는 방법도 필경엔 주사를 많이 맞고 약을 많이 쓰고 약탕에 목욕시켜서 낫는 것은 아닙니다. 원인이 거기에 있는 것을 알면 두말 말고 부처님께 엎드려 참회하고 같이 염불하고 마음을 싹 바꿔가지고 고난에 있어서나 즐거움에 있어서나 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환경, 이것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자신에게 있습니다. 부부 공동으로 이루어내는 가정도 그렇고 내 일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성장한 사람은 일체가 자신의 책임입니다. 또, 보다 넓게 보아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나 국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주체적인 권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자기 주변의 환경이 바뀝니다. 이런 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공이다라는 주체의식, 한 사람 한 사람이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자각을 촉구함으로부터 바로 이 세계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창조를 충분히 발휘해서 아름다운 꿈을 수놓아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원래 자기로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 열반이라는 데 이르러서 흔히들 이 몸뚱이가 다 없어지고 화장해 버려 아무것도 없으면 열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몸뚱이가 비록 없어졌다 하더라도 몸뚱이에 집착하는 생각, 애착, 분노, 원망, 미혹하다는 생각, 물질의 감각에 매달린 생각,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한은 몸이 열 번 없어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시 그 관념에 따라 생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도 윤회입니다.

비록 이몸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데 대한 집착을 쉬어 버렸을 때 열반은 증득되는 것이고 또 집착을 쉴 뿐만 아니라 자기 본성에 대해서 한번 눈길을 돌려서 자기 본성을 자각했을 때 바로 열반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열반을 죽은 후에 온다고 하거나, 이 몸이 없어져야 된다고 하거나, 모든 것을 다 버려야 된다고 하거나 하는 치우친 생각을 떠나서, 원래로 나의 생명 깊이가, 무한청정의 열반이 원래 내 생명입니다. 이 열반경계를 주체적으로 깨닫고 주체적으로 써서 주체적으로 창조를 전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열반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이해가 될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적극적인 열반 소식, 구체적인 열반소식, 열반이 가지는 무한한 창조의 세셰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의 관심이 새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반야는 제불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삼세제불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에서 나온다. 이것은 삼세제불과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하는 반야심경의 대목인데 이것을 한 마디로 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사람마다 모두가 무한청정의 무한공덕을 가지고 있는 깊이 모를 진리의 바다이고 진리생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모두가 그걸 모르는 이유는 지금도 보다시피 형상에 매달리고 물질에 매달리고 육체에 매달리고 듣고 보는 데에 매달려서 부분적 한계적인 것에서 자기 마음을 돌리고 원래 있는 자기 본래적인 것에 대해서 눈치를 못 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래적인 것에만 눈뜨면 바로 바라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바로 부처를 이루는 것입니다. 완전 성취한 저 언덕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반야라고 하는 것은 범부가 가진 유한 상대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부처님의 세계라는 무한 절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반야야말로 바로 모든 부처님을 탄생시키는 어머니다. 반야는 제불지모(諸佛之母)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반야를 알아버리면 있는 자리에서 사람 사람마다 즉시 깨달은 진리의 주체적인 주인공이 되어서 바로 불(佛)인 것을 직시하는 것이고, 또 이 세계가 바로 중생세계 악독한 세계가 아니라 바로 불국토 여래광명이 충만한 장엄된 정토라고 하는 것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야가 제불지모다. 제불의 어머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육조단경』에 육조스님이 깨닫는 장면에 대해서 저도 이 부분이 감동적이어서 많이 인용을 합니다만 육조스님이 이제까지는 육체만 보고 물질만 보고 마음이라고 하는 자기의 의식세계에만 마음을 두고 이것이 마음이라고 하다가 자기의 본성을 보았습니다. 본 성품을 보니까 여기에서 비로소 무한한 진리의 강물이 끝없는 진리의 바다가 자기생명에 너울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니까 거기서 감동어린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기자성 본자청정(何其自性 本自淸淨):어찌 나의 자성이 본래로 청정함을 알았으리까.
하기자성 본불생멸(何其自性 本不生滅):어찌 나의 자성이 본래로 생멸 없음을 알았으리까.
하기자성 본자구족(何其自性 本自具足):어찌 나의 자성이 본래로 덕성이 구족한 것을 알았으리까.
하기자성 본무동요(何其自性 本無動搖):어찌 나의 자성이 본래로 동요가 없음을 알았으리까.
하기자성 능생만법(何其自性 能生萬法):어찌 나의 자성이 능히 만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으리까.”

이렇게 감동어린 말로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오조스님이 비로소 그것을 인정하고 “바로 네가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이다. 네가 이미 불(佛)이다.”라고 말합니다. 금방 나무나 하고 마당이나 쓸고 방아나 찧고 하던 절의 노무자가 자기 본품성이라고 하는 깊은 생명에 눈을 뜬 것입니다. 바로 부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워낙 깊은 세계를 쉽게 말하기 떄문에 가벼이 넘기기가 쉽습니다만은 불자의 믿음은 이 꺠달음의 경계가 자기의 본소식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반야를 통해서 오조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생명에 끝없이 와 있는 것에 눈뜨고 그러한 무한공덕을 주체적인 책임에서 전개할 것을 배워야겠습니다.

「보현행원품」은 바로 그것을 내어 쓰는 방법입니다. 부처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아내를 공경하고, 남편을 공경하고, 형제와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공경하고, 감사하고, 예경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나의 주변에 있는 모든 공덕을 찬탄하고 기뻐할 일을 하나하나 발견하여 찬탄하고, 공양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보현행원품」에 나옵니다마는 그것은 바로 딴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해서 반야에 의해서 깊이 있는 자기 생명을 돌아봤을 때 그것을 쓰는 방법이 보현행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제 나머지는 무엇이냐 합창하고 감동하고 감격해서 뜨거운 생명의 윤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뜨겁고 뜨겁게 참되고 진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보현행자의 서원에서 나타났으니까 읽어가면서 자기 자중하시면 되겠습니다.

光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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