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수행의 기본은 예경이고 귀의입니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께 예경을 바치고, 그리 고 참회 공양하고 발원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귀의하고 예경하고 참회 공양하 고 발원하며 사는 불자 가운데서도 어떻게 부처님을 알고, 어떤 것으로 귀의를 삼으며, 예경 이 무엇이고, 참회는 어떻게 하는 것이며, 공양은 무엇이고, 발원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 해서는 제각기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아마 일반적으로 첫 대면에 “부처님은 어떠한 어른이신가. 그대가 믿고 있는 부처님은 무엇 인가.”하고 묻는다면 대답이 아마 천가지쯤은 나올 것입니다. 불확실한 것까지 내놓으면 어 쩌면 천오백 가지쯤은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구구합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다보면 골짜기가 여기저기 있고, 산모퉁이도 많고, 굽이굽이 크고 작은 봉 우리들이 있기 때문에 각각 특징적으로 그 산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것도 그 산 경치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골짜기 하나 어떤 바위하나도 그 산의 풍치를 말하지 않는 것이 없겠지만 정상을 두 발로 밟고 나야 비로소 그 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바라밀의 가르침은 산으로 말하면 정상을 답지해서 발로 밟은 후 거기서 나온 부처님의 믿음이고 그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산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반야바라밀 에서 믿음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리 불법을 많이 친견하고 불법산에 올라와서 불법산에서 평 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큰 산골짜기나 어느 나지막한 봉우리에서 이것이 산이더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이 가르침은 경의 말씀과 같이 삼세제불지모(三世諸佛之母)입니다. 삼세부처님은 바로 마하반야바라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대지혜의 완성’ ‘일체성취’ 이런 말로 그 뜻을 헤아립니다마는 실로는 가장 좋은 말은 다 붙여놓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바라밀염 송을 했습니다만 이 염송은 반야심경을 조금 풀이한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무상의 여의보주를 가졌다. 뜻대로 굴려서 마음대로 되는 여의주를 가졌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바라밀이다. ‘마하반야바라밀’. 관세음보살이 이 보배의 구슬을 굴려 서 일체고난과 일체 생사에서 벗어났다. 마하반야바라밀은 대신주(大神呪)다. 대명주(大明呪)다. 무상주(無上呪)다”하는 반야심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바로 마하반야바라밀은 일체 성 취고, 제불보살의 위력을 함께하는 것이고, 반야바라밀이 나아가는 곳에 일체 장애가 없어진 다 하는 말씀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능제일체고 진실불허(能除一切苦眞實不虛)라는 말을 몇 가지 푼 것에 불과합니다. 이 말들은 불광이 항상 독창적으로 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야심경에 있는 말이 바로 관세음 보살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뒤에서 다 증명하시는 가운데서 관세음보살이 앞에 나오셔서 말씀하신 것을 아난 존자가 듣고 있다고 기록한 그 곳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결코 여기있는 광덕이라는 어떤 사람이 마음대로 만들어낸 글이 아닙니다. 사실 마하반야바라밀은 삼세제불지모입니다. 최상의 법입니다. 바로 그 법을 통해서 관세음 보살이 관세음보살이 되신 것입니다. 그 법을 통해서 일체 제불-과거제불 현재제불 미래제 불도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하반야바라밀을 통해서 마하반야바라밀의 무 한의 위신력, 불공덕-아뇩다라삼먁삼보리, 최상각(最上覺)의 진리를 바로 우리 것으로 쓰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마하반야바라밀의 이 믿음은 불법 가운데 가장 큰 핵심이고 바로 지척에서 성불 하는 것은 이 가르침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범부로소이다 하고 살고 있어도 또 그 런 환경 가운데 살기로 되어 있다고 아무리 하여도 이 마하반야바라밀 일독하에 즉시 여래 광명을 발현하는 것입니다. 즉시 성불입니다.
반야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두고 바로 불국토로 바꿉니다. 부처로 바꿉니다. 바꿈없이 바꿉니다. 이 반야야말로 있는 그대로 중생 하나 하나를 놔두고 성불시키는 길입니다. 범부라고 생각했던 범부가 이미 일찍이 벌써 금강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흙덩어리나 썩은 나무등걸인 줄 알았더니 금강불괴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도리를 보이는 것이 반야입니 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마하반야바라밀 이 믿음을 확립한 모든 불자들은 바로 비범한 사람이라 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일체의 지혜, 일체 공덕이 무한대로 있는 것뿐이고 그것 은 말로 할 수 없고, 이론이 닿을 수 없어요. 이렇기 때문에 이렇고, 저렇기 때문에 저렇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논리가 딱 맞는다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논리가 없 는 것인데 논리를 붙이려고 한다 말입니다. 이론이 맞는 것은 맞는 대로 맞고 안 맞는 것은 안 맞는 대로 맞습니다. 실로 그 세계는 불가사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불광출판부에서 펴낸) 지장보살경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책을 넘기다보면 석주 스님 글씨가 나옵니다. ‘불가사의 불가사의 지장대성 위신력 인인장중 농보주(不可思議 不可思議 地藏大聖 威神力 人人掌中 弄寶珠)’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가사의하도다. 불가사의 하도다 지장보살님의 위신력이여, 사람사람마다 손아귀에 보배구슬을 희롱하는구나.’ 무엇인가 지장보살의 위신력을 한마디로 짧게 하는 말이 없는가 하고 버스를 타고 궁리를 했더니 지장경 가운데 앞에 나오는 지장신중경의 서품을 읽고 나니까 그 생각이 딱 떠올랐 습니다. 그래서 석주 노장님께 써서 올려서 지장보살의 위신력을 보였는데 그것은 불가사의 뿐인 것입니다.
그 바라밀의 세계는 불가사의지 논리를 대고 무엇무엇하는 것은 부득이해서 논리를 대야 알 아듣고, 합리해서 비로소 속아넘어가는 사람들에게만 합리의 처방을 내주는 것입니다. 그러 나 인간 자체가 합리적 존재가 아닙니다. 합리로 쪼개질 수 있는 것이 인간생명이 아닙니다.
합리 이전입니다. 논리 이전입니다. 사유 이전입니다.
그런데 논리와 사유를 붙여가지고 인간을 평가하고 인간의 도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우습 습니다. 인간 본체가 논리 이전자. 사유 이전자, 원천적인 근원자입니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공덕의 세계가 그렇습니다. 할 수 없어서 논리와 이론을 세우는 것이고 실로는 불가사의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보현행원품 첫마디에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공덕을 설 명하다가 하다가 나중에는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불가사의 세계를 어떻게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에 대해서도 역시 아무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지금 서서 말하고 있다고 하 지만 서서 가만히 있지만은 않습니다. 손도 움직이고 입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만히 서있지 않고 앉았다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움직이고 변해가는 아무개를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하거늘 하물며 유무(有無)를 떠난 진리의 세계를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거듭 말해서 반야바라밀의 이 세계는 바로 제불의 세계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이 론으로 세워서 이러니 저러니 하지만 모든 부처님의 세계는 오직 불가사의일 뿐입니다. 저도 즐겨서 말을 하고, 이론과 논리가 안 서면 조금도 따라가지 못하고, 논리만 빼면 곧 자빠지는 인생을 평생 살아온 사람입니다.
부처님께 절하지만 왜 절해야 하는지 긍정이 안 되었을 때는 선방에 살면서도 절대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타협하기를 단체생활이니까 운동하는 셈치고 해주자고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잘한 것 같아도 어쩔 수 없이 가련한 시절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경계라고 하는 진리의 세계는 한마디로 불가사의하다는 것입니다. 이 마하반야바라밀이 바로 부처님의 진경계입니다. 이 마하반야바라밀이 바로 우리 생명의 진경계 이며 우리 믿음의 진경계입니다. 실로 우리 생명의 진처는 불가사의다 하는 것이 제 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조사스님들은 깨달은 경계를 말로 해서 불법이 이렇다고 말을 하려하면 틀렸다고 보내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한마디 일러봐야 닿지 않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냥 오직 불가사의 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세계, 이것이 우리 생명의 진처이고 진리 의 원모습이고 부처님의 원래 세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바라밀의 신앙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바라밀의 믿음으로 사는 불광 식구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불가사의를 행하는 사 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는 이럴 수밖에 없다하고 한숨지을 수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 게 엎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자기를 포기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세간적인 머리에서 그런 것 뿐입니다. 세간적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유가 닿지마는 마하반야바라밀, 부처님의 경계는 그런 조건이 없습니다.
저는 이 세계를 자칫하면 말로 할 수밖에 없어서 애써서 말을 합니다마는 사실 말로 해봐야 가짜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냐 말로 할 수 없다고 하고, 불가사의라고 그래주는 것입니 다. 불가사의라는 곳에서 불가사의한 것이 나옵니다.
‘무일물중 무진장(無一物中 無盡藏)’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한 물건도 없는 가운데서 무진장하게 나온다.’ 부처님경계가 그런 것입니다. 한 물건도 없어야 이것이 불가 사의 경계입니다. 진리의 근원은 한 물건도 없건만 무진장한 것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무일 물중 무진장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제 모습입니다.
진리 그대로 마하반야바라밀 그대로, 삼세제불이 가지는 공덕의 바다 그대로, 그야말로 일체 성취, 일체 조화, 일체 원만, 일체 평화, 영원한 창조 그것이 완전히 구족되어 있는 상태가 마땅히 우리 마음 가운데, 우리 생활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이 원래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