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제일법문

항상 말하다시피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불자의 의무입니다.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것입니 다. 자기 자신이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절대 무한의 진리가 자기 생명의 원래의 것이 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런데 왜 금덩어리가 금덩어리의 가치를 하지 못합니다? 왜 금강석이 금강석의 견고성을 가지지 못합니까? 왜 다이아몬드가 찬란한 광명을 잊어 버립니까? 찬란한 광명을 가지고 견고한 성품을 가지는 것 이것은 당연히 다이아몬드의 의무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알아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그렇게 돼야 합니다.

마땅히 행복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성불해서 극락세계에 가서 누리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그 공덕이 꽃 피우고 결실이 돼서 참으로 우리 생활 구석구석이 반야바 라밀이 꽃피는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안 되는가. 마하반야바라밀을 우리 의식 밖에서 놓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밖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마하 반야바라말이 아닌 생각들 소위 쉽게 말하면 번뇌 .망상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물질이다. 혹은 있다. 없다, 변화한다, 좋다, 나쁘다 하는, 온갖 잡다한 생각들을 통해 가지고 그릇된 생각들이 확 덮여 있기 때문에 금강석은 여전히 금강석이건만 그 위에 덮여있는 대, 구름.안개에 매달려서 살기 때문에 안개 세계, 때의 세계, 허무의 세계 가운데 매달려 사는 것입니다.

진처(眞處)는 금강석이건만 그가 인식하고 잇는 세계는 허무의 세계입니다. 인간개개인이 불 멸의 진리로 살고 있건만 그가 쓰고 있는 세계는 허무한 세계를 살고 있단 말입니다. 이게 범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라는 것입 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관(觀)하라는 것입니다. 입으로 외면 바로 염송이고, 생각으로 염하면관이라고 합니다. 실로는 반야바라밀은 생각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 안에 들어올 수 있다면 그것은 망념의 하나지 무엇이겠습니까. 생각이전자입니다. 그렇지만 할 수 없이 우리는 생각으로 염해서 염하고 염하면 마침내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농가성진(弄假成眞)입니다. 가짜를 희롱하여 진짜가 된다는 말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말하고 매일 외마디 소리로 마하반야바라밀을 미친 듯이 외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세우고 역사를 세우고 세계를 세우는 원리입니 다. 쓰러지는 인간,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고 변멸하는 인간, 허무한 인간, 가치가 없는 인간, 찰나찰나 그때 그때 자기를 속이고 살다가 늙고 병들어 죽어버리면 그만인 허무한 인생, 그 러한 그릇된 것들을 일조에 쓸어 버리고 영원 불멸의 태양 같은 인간의 권위를 일으키는 진 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질과 환경조건에 적당히 조절이나 하고 거저 목구멍에 적당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땅에 떨어진 인간의 권위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이 길입니다. 인간의 가 치를 이와 같이 해서 절대 진리로 바로 세워야 합니다.

요새 법등 임원의 특별가족 점등모임을 다니면서 대개 공통적으로 주는 지시 사항이 몇 가 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일과(日課). 일과를 잘 지키고 있는가? 철저히 기도하고 있는가. 불보살이 함께 하고 있다. 분명히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진리 광명 가운데 그대가 있다. 결코 게으르지 말 고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내서 일과를 착실히 해라. 착실히 기도를 해라. 그렇게 해서 너 자신 가운데 있는 마하반야바라밀의 위력을 너의 생활가운데 꽃피워라.” 이것이 제1조로 하 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여기 나와서도 마음 속에 깊이 둘 것은 우리 생명의 진처가 바로 마하반야바라 밀이라고 하는 절대 부위의 진리, 부처님의 근원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고 그 것에 대해서 망념에 사로 잡히지 않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정진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이렇게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면 그 행동이 달라져야 하는것입니다. 불광에서 우리 의 믿음의 증거를 삼은 것이 여남은 가지가 있죠? 그것은 바라밀을 우리가 잊어버리지 않도 록 바라밀행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진 리를 행동으로 쓰는 것입니다. 밝은 얼굴, 긍정적인 말, 찬탄하는 말, 용기있는 말, 활기있는 행동들 등등.

그가운데서 제가 오늘 우리들 마음 가운데에 특별히 새겨 줄 것은 요사이 세속에서 하는 말로 남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말로는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이기주의, 자기위주로 행동을 해가지고는 행동이 오그라지기 때문에 마하반야바라밀의 공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 인가 돕는 것을 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남에게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육바라밀이라고 다들 아실 것입니다. 보살이 닦는 여섯가지 바라밀의 길인데 그 첫째가 보시입니다. 보시가 무엇 인가. 내게 있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무엇이냐 애착을 떼 내는 것입니다. 집착을 떼는 것입니다. 애착과 집착이라고 딱 가두고 있는 것, 내것 내것이라고 집착하고 있는 것을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꽉 닫혀진 성문을 허무는 것입니다.

허물 때 비로소 무한 청정이 내 가슴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애착과 집착 내것, 내것 하고있는 그 상태를 쥐고 있는 한 입으로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해봐도 반쪼가리 입니다.

맘먹고 남을 도와주고 아낌없이 보시를 해서 베풀어 주고 법공양을 행하는 이 사람에게 어찌 바라밀 공덕이 채워지지 않겠습니까? 가난은 애착,집착, 자기 중심의 집착에서 오는 것입 니다.

그 전에 부처님께서는 이 중생들이 지혜롭고 부(富)하게 되며, 참된 자기 복귀를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법문을 설하십니다. 도를 이루신 처음에 재가인들을 위해서 하신 법문을 죽 보면 제1은 보시입니다.

그 다음은 청정한 계행을 가져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나리라 천상에 나리라 “고 하셨습니다. 인과를 초월한 경계를 처음에 말하면 모르니까 우선 인과에 대해 말씀하시 고, 또 좋은 것은 다 좋아하니까 천상에 가는 이야기를 설하셨습니다.

그 관계는 여기서 여기로 옮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한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와서 말씀이 나옵니다. 초기에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반에 드실 때는 어떠했던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쿠시나가라에 가시기 약 한 달쯤 전에 갠지스 강 어느 하구의 나루터에 오셔서 그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셨는데, 그 자리에서도 하신 법문은 보시의 법문이었습니다. 보시의 공덕을 죽 말씀하시고 보시를 행하랄 말씀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가지 이르신 바는 바 로 그 보시법문입니다. 나는 부처님께서 이렇게 보시법문을 하신 것은 중생들이 애착과 집착에 매여서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을 묻어 버리고 가시기 위해 그 말씀을 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애착과 집착을 허물어 버려서 무한 청정이 그 가슴에 안기에 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보시의 법문을 그렇게 간곡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기왕에도 몇 번 했지만 애착과 집착, 자기 중심에다 인색한 간탐심을 꽉 쥐 고 있어서 내 가슴에 복이 안겨지려 해 봐야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보시행, 남을 도와 주는 봉사행, 그리고 밝은 부처님의 법을 전해 주는 법보시행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타가 없는 바라밀행을 해야 생각과 말로 하는 마하반야바라밀이 상응하기 때문에 마하반야바라밀의 무한공덕이 가슴에서 용솟음쳐 와서 한 사람 한 사람 마하반야바라밀의 공덕이 가지는 그대로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앞 뒤 동서남북이 꼭 막혀도 마 하반야바라밀은 막히지 않았습니다.

항상 말하다시피 우리가 눈으로는 살 수 없다 하고, 세상이 막혔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 마 하반야바라밀을 굴리는 관세음보살께는 살 길이 출중되어 있습니다. 남이 보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은 기적일 것도 없습니다. 그저 본래 통해 있는데 이리저리 막혀 있다고 울고 야단하는 것입니다. 세간의 눈으로 봐서는 그저 기적이라고 하고, 논리밖에 모르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불가사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오늘 여기 왔습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산 가운데서는 제일 높은 산입니다. 그리고 제 일 높은 산 이 정상에 여기 이 부처님을 모시는 연주대에 왔습니다. 우리들은 최상의 법문 에서 나 자신의 생명울 분명히 세우고, 있는지, 내 생명이 분명히 마하반야바라밀 생명이 충 만되어 있는지 여쭈어 봅시다. 그래서 불가사의한 그 위신력을 해낼 수 있는 기적의 사람들 이 과연 기적적인 행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여쭈어 봅시다. 그 다음에 못한다면 무엇이 막 고 있는지 다시 여쭈어 봅시다.

용기 있는 사람이 불가사의한 공덕을 받을 수 잇습니다. 용기 있는 결단이 그에게 와 있는 가슴 진리의 물줄기를 퍼올립니다. 아무리 내게 물이 꽉 차 있다 하더라도 애착과 집착에 짓눌려 이기적 타산적 몰입만 꼭 차 있는 한은 그 불가사의한 샘물은 못 나오는것입니다.

이 정상에 온 이 인연으로 우리들의 생명 밑바닥에 있는 자비 위신력을 더욱 확인하고, 이 산으로부터 온 누리에 부처님의 광명이 뻗치는 것 같은 심정으로 오늘 이 산을 살고, 이 산 에서 내려가고 거리를 다닐 때마다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위신력을 쓰는 사람이 돕시다.

그리하여 불가사의한 공덕을 뿌리는 사람이 될 것을 거듭 다짐합시다. 우리와 우리의 국토에 진리를 충만시키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을 거듭 다짐합시다.

光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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