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활을 보면 사실 성공을 추구한다 하면서도 실패했던 일들을 마음에 가지고 있고 고 통스러웠던 일들을 마음에 담아 가지고 항상 그것이 가슴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완전한 위신력과 완전한 자부심이 우리 생명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 면서도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지금 처한 고통의 순간에서 빨리 벗어나야 지 하는 등 헐떡이는 생각을 더 많이 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애로운 세계를 추구한다 하면서도 실지 마음속에서는 장애를 마음 가운데 붙들고 있기 때문에 장애 에서 좀체 벗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 바라밀의 세계, 내 생명의 부처님의 무한 공덕의 세계를 믿는 사람은 끊임없이 그곳에 마음을 둡니다. 부처님의 지혜와 덕성이 꽉 차 있는 그 마음에 마음을 두 고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불자의 생활이고 기도인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 기도하고 수행하는 이 생활은 인내를 가지고 지켜나가야 됩니 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깨달음의 세계에다 자기 마음을 일치시켜서 나라고 하는 한정의 깨 달음의 진리가, 부처님의 공덕이 나타나게 하는 데는 수많은 장애요인들이 우리들 의식. 무 의식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완전히 녹아 없어져 장애요인이 제거되려면 그만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형상없는 진리가 형상있는 우리 세계까지 나타나는 데 는 과정이 있어요. 시간이 필요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수행하는 가운데서 뜻하는 바가 나타나지 않을 때 조바심을 내고 잘못됐는가 하고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음악을 들으려고 다이얼을 자꾸 빙빙 돌리면 언제 지나가며 차례가 올지 모릅니다. 일전한 데 맞춰놓고 좀 기다리는 것입니다.
요는 우리들의 생각이 이제까지의 오온이라는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 육체적인 것, 이런 습관에 가득히 젖어서 깊이깊이 묵은 그림자기 쌓여있습니다. 그것을 소탕해서 그것을 완전 히 지움으로써 청정한 맑은 물 그대로 내 생명에서 흘러 나오도록 하자면 시간이 필요합니 다. 절차가 필요합니다.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수행하거나 기도하 시는 분들 가운데서 내가 항상 이렇게 부처님의 깨달음에다 마음을 두고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완전한 지혜의 성숙, 부처님의 무한공덕 세계에다 마음의 눈을 두고 조바심 을 내지 말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부처님의 자비하신 공덕에 대해서 전적인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막연한 상태를 가지고는 막연한 것입니다. 초점이 뚜렸하고 분명할수록 그 결과도 분명한 것처럼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야심경을 공부하는 데에도 문자의 어려움에 매이지 말고 내 생명 속에서 부처님의 목소리 를 듣고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 바라밀의 진리가 내게 있는 것에 마음의 눈을 두고 반야심 경을 읽자, 이렇게 함으로써 반야심경의 공덕을 우리 생활로 퍼내자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 은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부분은 다른 기회에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생은 끝모를 길 분명히 끝이 있기는 하는데 언제 그 끝이 나타날지 모르는 어둠의 길을 걷는 것과 흡사합니다. 사방 전후 좌우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떤 고난이 닥쳐올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고난인지 혹은 재산에 대한 고난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죽음이라는 것, 범부로서는 생명의 종말을 의미하는 위험이 명백히 앞에 가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길을 우리 인 간은 헐떡이면서 지금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과 공포가 깃들 어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이 공포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공포에서 벗어 나는 길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포의 본질은 불안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 그 본질을 따져보면 일심에 관한 것, 마 음에 관한 것, 가족에 관한 것, 재산에 관한 것 혹은 사회적인 명예나 혹은 자연적인 것 온 갖 주변에서 우리에게 불안을 가져오고, 이 불안이 공포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에게 불안을 가져오고 공포를 가져오는 원인이 몸과 마음으로든가 사회환경이라든가 가족이 라든가 재산이라든가, 명예라든가, 자연에서 오는 것이라든가 이런 것인 것을 알 것 같으면 반야야말로 이러한 원인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도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것 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반야에 의하여 마음이 본래 걸림 이 없고 거침이 없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자의와 연구에 의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 직 깨침이 있을 뿐입니다. 의심없이 스스로 긍정할 것뿐입니다. 자기의 참된 면목이, 자기의 참된 마음의 땅이 요달하였을 때 요달한 대장부가 받아쓰게 되는 경계입니다. 이것은 우리 가 지금 말했습니다만, 공포 불안의 원인이 일심과 재산과 환경주변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에서 볼 때 필경에는 공하고 없는 것인데 원인부터 없을 바에야 그 다음에는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결국 공포에서 벗어나 공포라고 하는 가로막힌 요인들이 제거되고 보면 그 다음에는 청정한 공덕이 그곳에서 나옵니다.
무유공포(無有恐怖)라고 하는 것은 공포가 없어져서 무유공포가 아닙니다. 공포가 원래부터 없는 바라밀의 경계에 마하반야를 통해서 바라밀의 경계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쓰고 그것을 누리기 때문에 무유공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야는 가장 가까이는 우리 생활에서 불안을 해소하고 공포를 해소해서 마음의 평화와 마음의 안락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효과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경사스럽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갖고, 경사스러운 일, 다행스러운 일을 처처(處處)에서 발견하도록 힘쓰자고 했습니다. 만일 몸은 다 건강한데 바른 손이 아프다고 해서 바른손 아픈 데다가 마음을 두고 매일 아프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내 마음 전체가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건강하고 왼팔이 건강하고, 발이 건강하고, 위가 건강하다는 등 건강한 부분에다가 마음을 두면 건강함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는 사실인 즉슨 우리가 잘못 봐서 그렇지 이 환경 전부가 진리의 공덕이 가득찬 경사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다행스러운 것으로 알고 끊임없이 발견하고 내 자신 가운데서 다행스러움, 경사스러움, 감사함,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의 바라밀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자 자신에 대해서도 찬탄이 나오는 것이고, 또 내 가족에 대해 서도 찬탄이 나오는 것이고 참 장하다 하고 칭찬의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국토에 대해서도 한탄하기보다 역시 무수한 공덕이 여기에 있어서 우리 가 수행을 하고, 우리가 참된 영혼의 성장을 가져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뜻을 피력할 수 있는 숙명의 땅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서 이 땅 이 시대에 태어난 내 책임과 내 보람을 펼 수 있는 자세가 갖추어 지는 것입니다. 반야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이렇게 불안과 공포가 없 는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이 보아집니다.
어쨌든 그 마음 속에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평화한 마음을 가지 고 있는 사람에게서 필경엔 반야에 의해서 드러난 바라밀의 생명에 있는 영원히 불안이 없 고 공포가 없는 경계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보면 여기에서 우리가 거기에 관련시켜서 생각 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이 심청정(心淸淨)이 정의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정하다고 하 면 마음이 한 점도 없는 것, 번뇌 망상이 없는 것, 번뇌 망상이 다 없어져서 맑게 깨달았다 고 하는, 깨달았다고 하는 것도 없는 것, 그래서 본래의 청정세계, 본래의 청정세계에 나타 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는 이 본래 청정의 경계가 드러난 것을 경에는 정견(正見)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제일 중요히 여기는 것이 정견입니다. 올바른 견해입니다. 올 바른 견해를 하게 되면 올바른 지혜를 말하는 것인데 경에서 보면 선지식으로서 제일가는 조건이 무엇인가. 첫째는 정견(正見)이다. 견해가 명백해야 한다.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 다. 올바른 지혜의 눈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청정하다. 한 물 건도 없는, 참으로 청정한 본자 청정의 경계가 나타날 때 올바른 견해, 정견을 쓰는 것입니 다.
부정견(不正見)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전도견(顚倒見)입니다. 전도견이란 견해가 바뀐 것입 니다. 전도에는 불교에서 교리적 정리를 해보면 두 가지 종류를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전 도라고 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영원하고 이 세상 범부가 보는 세계에 대해서 그것이 또한 즐거운 것이고, 또 분명히 자기 중심이 있고, 그리고 이 세계가 다 그대로 청정한 것이다라 고 보는 견해입니다.
아무리 이것이 다 그대로 청정한 것이다라고 해봐야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요새 와서 내 주변의 거울을 안 볼 적정입니다. 아무리 고운 꽃도 피면 시들고, 떨어져서 무참히 쓸어 버려야 할 쓰레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원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현상에 대한 그릇된 집착입니다. 전도견(顚倒見)입니다.
또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고 매달리고 있는 한은 그는 곧바로 고(苦)로 바뀌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와 같이 끊임없이 변멸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변멸을 통해서 붕괴되고, 붕괴된다는 것은 죽음을 가져오고 고 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반야심경을 공부할 때 배웠다시피 나라고 하는 것, 나를 구성하고 있는 육체라고 하는 것, 나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 의식이라고 하는 것, 아니면 우리들을 둘러싸고있는 물질이라고하는 것이 모두가 무엇이냐 실로는 없는 것입니다. 공허한 것입니다. 몇 가지 인 연이 화합한 것뿐인데 그것을 있다고 생각하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애착을 가지고 매달립니다. 그렇지만 애착을 가지고 매달려서 뭐 할 것인가. 그것은 인연의 물거품이 생겼다가 또 없어지듯이, 구름이 있다가 흩어지듯이, 역시 모인 것은 인연따라 가 버리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현상에 있는 세계는 이와 같이 영원할 것도 없고 좋을 것도 없고 주체적인 것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매달리는 것은 범부들이 갖는 전도견입니다. 정견이 아 니라는 말이지요.
또, 유위(有爲)에 의한 전도견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벗어났다는 견해입니다. 벗어나서 벗어 남에 집착해 있는 견해, 이것은 성문이나 연각들이 가지고 있는 전도견으로서 그것을 또한 제거한 것이 유위 전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첫째, 이 물질 적인 것, 현상적인 것이 미혹에 의해 생긴 것이라면 그 미혹에서 벗어나서 벗어난 경계를 얻었다 하는 것도 역시 미혹입니다. 그 상관관계에서 한쪽은 유(有)요, 한쪽은 무(無)입니다.
유를 제하고 무에 집착하는 데 불과 합니다.
그러나 반야에서는 원래부터 없는 것이지 없애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의 경계, 물질의 경계, 이런 장애의 경계를 없애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없는 것을 깨치는 것입니 다. 거래서 원래부터 없는 심청정 세계에서부터 올바른 정견이 열리는 것입니다.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