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들이 늘 독송하고 있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가르침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생명의 원모습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만이 가지고 계신 부처님의 전유물을 대단한 것으로 설명해서 부처님을 우러러 뵈게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의 비범하신 -정말 우리가 우러러 뵐 – 완전 구족한 진리를 부처님에게 보듯이 나 자신의 생명으로서 스스로 느끼고 살게 하는 것이 반야심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말씀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생명에 대한 우리들의 목소리여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분이 <반야심경>을 독경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나는 그분께 “부처님의 말씀을 내가 읽지만 읽음에 따라서 진실로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 경계를 자기 자신에게서 보는 것이다.”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있습 니다. 실제로 <반야심경>도 이렇게 우리가 반복해서 읽고 또 길이 그 뜻을 살피는 가운데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다음엔 부처님의 목소리가 나오는 그 깨달음의 경계, 참 부처님의 경계를 자신에게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계를 자신에게서 본다는 것은 지기의 참된 진리 내 생명에 깃들어 있는 진리를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반야심경>을 통해서 우리가 부처님의 목소리를 접하고, 부처님의 경계를 접하고, 부처님의 목소리나 부처님의 특별하신 경계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우리들 자신의 경계로서 내 생명의 참모습으로서 그것을 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가장 가까운 일로 “우리 일상 생활에서 마로 이 <반야심경>의 진실한 경계를 자기 자신 으로 항상 봐야 한다. <반야심경>이 보이고 있는 진실한 경계를 자기의 참모습으로서 자기가 봐야 한다. 반야바라밀 행자는 부처님이 보이신 <반야심경>의 경계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긍정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반야심경>은 필경 우리의 관점을 어디에 돌리느냐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가 없어서 그저 미혹한 상태로 보고 느끼고, 알고, 이론으로 분석해서 헤아리고 짐작하는 것은 지혜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지혜가 없는 상태에서 눈을 떼고 자기의 참 모습, 진리의 세계에 자기의 눈을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깊이 흐르고 있는 생명의 참모습 우리의 생명에 깃든 참된 우리의 얼굴을 보고 그곳에다 관점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바로 지혜의 눈으로 보는 바 세계를 열어줍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공부하고 수행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서 지혜가 없는 범부 상태에서 보는 바 그러한 경계에 마음을 두지 말고 지혜의 경계인 –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계인 – 그 것을 자기 생명의 참모습으로 보고 거기다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가 항상 배워서 알다시피 이렇게 육체가 있고, 이렇게 못났고 잘 낫고, 이런 능력이 있고 없고 이러한 경계를 우리가 봅니다마는 이것이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 이것은 우리가 미혹한 상태에서 미혹한 것을 보고 미혹한 상태에서 인정한 것이 그야말로 운명적인 이 몸뚱이로 나타난 것입니다. 내 사업이나 내 환경이나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까지도 합해서 바로 나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에 관점을 두고 있느냐,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느냐, 그 마음 있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 그것이 그 사람들의 생존의 기초를 형성해주고 운명적인 사건들을 끌어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도 그래서 우리가 어디다 마음을 두었느냐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렇기 때문에 미혹한 상태의 중생들의 세계는 미혹함으로써, 미혹한 상태에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을 그곳에 두고 있기 때문에 미혹한 세계가 벌어지고, 미혹한 상태가 천만 가지가 있기 때문에 중생들도 미혹했을 망정 천만 가지 차별이 있는 이 인생이 각기 벌어집니 다.
미혹이라는 착각적인 관점에 대해서 우리들이 눈을 떠서 깨달음의 경계로 나아가는 것이 수 행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생활 가운데서 나타나는 현상들 하나하나가 미혹에서 온 것, 미혹에다 마음을 두고 있는 것, 미혹에 내 마음의 관점을 맞추고 있는 것 그 미혹 상 태에서 나의 생활이 벌어지고 나의 일상 생활 가운데 중생 범부적인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개혁하는 방법도 미혹의 눈에서 눈을 떼서 깨달음의 눈으로 바꾸는 것이고, 이것을 관점을 바꾼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다 눈을 둬야 하겠느냐 이것을 말해 경계를 자신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계를 자신에게서 본다는 것은 자기의 참된 진리 내 생명에 깃들어 있는 진리를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반야심경>을 통해서 우리가 부처님의 목소리를 접하고, 부처님의 경계를 접하고, 부처님의 목소리나 부처님의 특별하신 경계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우리들 자신의 경계로서 내 생명의 참모습으로서 그것을 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가장 가까운 일로 “우리 일상 생활에서 바로 이 반야심경의 진실한 경계를 자기 자신 으로 항상 봐야 한다. <반야심경>이 보이고 있는 진실한 경계를 자기의 참모습으로서 자기가 봐야 한다. 반야바라밀 행자는 부처님이 보이신 반야심경의 경계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긍정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반야심경>은 필경 우리의 관점을 어디에 돌리느냐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가 없어서 그저 미혹한 상태로 보고 느끼고, 알고, 이론으로 분석해서 헤아리고 집착하는 것은 지혜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지혜가 없는 상태에서 눈을 떼고 자기의 참 모습, 진리의 세계에 자기의 눈을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깊이 흐르고 있는 생명의 참모습 우리의 생명에 깃든 참된 우리의 얼굴을 보고 그 곳에다 관점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바로 지혜의 눈으로 보는 바 세계를 열어줍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공부하고 수행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서 지혜가 없는 범부 상태에서 보는 바 그러한 경계에 마음을 두지 말고 지혜의 경계인 –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계인 – 그것을 자기 생명의 참모습으로 보고 거기다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가 항상 배워서 알다시피 이렇게 육체가 있고, 이렇게 못 났고, 잘났고, 이런 능력이 있고 없고 이러한 경계를 우리가 봅니다마는 이것이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 이것은 우리가 미혹한 상태에서 미혹한 것을 보고 미혹한 상태에서 인정한 것이 그야말로 운명적인 이 몸뚱이로 나타난 것입니다. 내 사업이나 내 환경이나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까지도 합해서 바로 나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에 관점을 두고 있느냐,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느냐, 그 마음 있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 그것이 그 사람들의 생존의 기초를 형성해주고 운명적인 사건들 을 끌어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도 그래서 우리가 어디다 마음을 두었느냐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혹한 상태의 중생들의 세계는 미혹함으로써, 미혹한 상태에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을 그곳에 두고 있기 때문에 미혹한 세계가 벌어지고, 미혹한 상태가 천만 가지가 있기 때문에 중생들도 미혹했을 망정 천만 가지 차별이 있는 이 인생이 각기 벌어집니다.
미혹이라는 착각적인 관점에 대해서 우리들이 눈을 떠서 깨달음의 경계로 나아가는 것이 수 행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생활 가운데서 나타나는 현상들 하나하나가 미혹에 서 온 것, 미혹에다 마음을 두고 있는 것, 미혹에 내 마음의 관점을 맞추고 있는 것, 그 미혹 상태에서 나의 생활이 벌어지고 나의 일상 생활 가운데 중생 범부적인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개혁하는 방법도 미혹의 눈에서 눈을 떼서 깨달음의 눈으로 바꾸는 것이고, 이것을 관점을 바꾼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다 눈을 둬야 하겠느냐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반야심경입니다.
같은 말 열 번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반야심경> 내용입니다. 모름지기 자기 생애 참된 생명에다 눈을 두고 나의 참된 생명에 부처님의 위신력이 지금 함께 파도치고 있고 이 내 생명 속에 깃들어 있는 무한 공덕의 바다에다 눈을 두고, 그곳에 내 마음을 두고, 거기에 나의 정성을 두고, 그것을 한결같이 내 마음속에서 놓치지 않고 잡아 가지고 간다고 하면 이것이 반야심경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육체의 세계, 물질의 세계, 고난의 세계 여러 가지 장애가 오고 고통이 오는 세계, 풍파가 많은 세계에 마음의 관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풍파가 없는 세계, 깨달음만 있는 세계, 건강과 행복이 오는 세계, 진리의 세계에다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내 모습이 부처님의 지혜에서 볼진대 부처님의 무한 진리가 그냥 무한대로 주어진 것이 우리 인간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이제까지 그것을 공부해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 둘 곳은 이와 같이 해서 자기의 참된 생명 깨달음의 세계, 건강과 행복과 조화와 성취가 오는 이러한 깨달음의 경계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의 경계에 내 마음의 눈을 맞추고 그 이외의 것엔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이 날 미워하는데 왜 미워하는가 참 미운 사람이로구나 한다든가, 저 사람이 날 해치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보복할까, 이런 세간적인 대립, 불행스러운 것, 여기에다가 마음을 두면 관점을 그 곳에 두는 것이고, 그러면 그 관점을 둔 것이 나타나는 까닭에 지금 우리가 사는 이런 세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실제로 종종 그런 말을 많이 해왔습니다마는 우리 현상계를 나타내는 사건들의 원인을 추구해보면 진리 자체는 완전 구족한 것밖에 없습니다. 내 생명이나 우리의 환경에는 완전 구족한 진리만 나타나 있는데 우리 생활 주변에 완전하고 명료하고 덕스럽고 평화스러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완전한 상태와 틀리는 다른 데다 마음을 두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데다 마음을 둔다는 말은 다른 마음을 쓴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졌다는 뜻입니다. 비뚤어진 현상이 나와서 이러이러한 사고가 났습니다. 이러이러한 변고가 났습니 다. 이러이러한 집안의 불화가 생겼습니다. 무슨 약을 발라라. 어디 가서 무엇을 해봐라, 이런 이야기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그 근원적인 치료법의 하나가 그렇게 마음을 쓰면 이런 결과가 나오니 이런 결과가 나온 걸로 봐서 그런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냐. 형제와 대립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조상과 대립을 가지고 있거나, 가장 가까운 사람들끼리 예를 들 면 부부 사이에 서로 불화가 있는 것이 아니냐. 말하자면 나타나는 결과는 나타나는 장소, 나타나는 곳을 보면 어디에 무슨 마음을 썼구나 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어느 분이 류머티스 병을 호소해 왔길래 가장 가까운 형제들한테 감사하며 염불하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하더라도 형제들한테 감사하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하며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까운 이야기입니다만 실제 우리의 생존의 바닥에는 원만하고 화평하고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진리가 이미 와 있는데 그것을 진리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어긋나는 데다가 마음을 두었기 때문에, 삐뚤게 썼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다른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이 나타난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는 관점에 다라서 우리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 생활 가운데 평화를 바라고, 조화를 바라고 서로 성장을 바라고, 성취를 바란다면 마음을 거기에 두어야 합니다.
평화와 조화와 성취의 근원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법입니다. 부처님의 크신 위신력입니다. 이 법이며 부처님의 크신 위신력인 진리는 밖에 깔려 있지 않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나의 생명이 바로 이와 같이 창조적이며 지혜로우며 조화를 이루며 일체를 성취시키는 위신 력이 넘치고 있다는 데에 관점을 두어야 합니다. 눈을 두어야 합니다. 마음을 바꿔야 합니 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환경은 끊임없이 진리에서 나오는 평화와 성취와 조화가 이루 어질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끝끝내 이것을 가르칩니다. 지혜를 가르쳐서 “네가 가지고 있는 것, 겉으로 보고 느끼는 것, 그걸 보고 밉다고 생각하거나 비뚤어졌다고 생각하거나 이렇게 대책을 여러 가지로 생각했던 것.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거기서 마음의 눈을 떼어라. 그 모두는 물질적인 것이고 그 모두는 정신적인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요. 육체적인 것이다. 그런 것은 오온(五蘊)으로서 공(空)이다. 없다. 원래 없는 것이니까 있는 걸로 알고 집착하고 거기다 생각을 두지 말아라.” 이렇게 가르쳐 줌으로서 무지상태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눈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진리를 보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부처님의 법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상을 평화스럽게 하고, 세상사람들을 착하게 만들고, 세상사람들을 서로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꾸며낸 교리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반야심경> 공부를 하면 그걸 잘 알게 됩니다. 부처님은 원래대로 있는 진리를 지혜의 눈을 뜨고 바르게 보시면서 본 그대로를 ‘이와 같다’하고 선언한 것입니다. 진리가 이와 같다 하고 원래부터 있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분쟁보다는 평화를, 실패보다 는 성취를, 대립보다는 화합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의 눈을 이와 같은 진리에 둔다.” 이렇게 말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평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성취하기 위해서 방법으로 방편(方便)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로 나의 생명이 바라밀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완전한 지혜, 완전한 덕성과 완전한 의 욕이 함께하고 있는 부처님의 무한절대 진리가 바로 나의 생명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입니다. 진리의 눈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실인 것을 긍정하고 지혜의 눈을 뜬 사람이면 그것만을 보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에 현혹되지 말고 끌려가지 말고 끊임없이 마하반야바라 밀을 염해서 내 생명에 있는 마하반야바라밀에 눈을 두어야 합니다. 관점을 자기 자신의 진실생명에 두라,. 그렇게 해서 진실생명에 있는 부처님의 무한공덕을 우리 생활 가운데로 끌어 넣어라 하는 것이 우리 마하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불광의 핵심이요, <반야심경>의 요체인 것입니다.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