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범부중생이라 하지만 실로는 여래공덕 충만한 완성자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본분을 깊이 믿고 선지식의 가르침을 따라 닦아간다면 결정코 청정신을 증득하게 됩니다. 확신을 가집시다. 무상법의 구현이란 우리의 본분을 열어 가는 것이니 오직 바른 믿음과 묘법을 닦을 뿐입니다. 깨달음의 길은 우리가 선지식을 만나서 선지식에 의지해서 묘도를 닦으면 무상의 대도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착각을 없애는 것입니다.
여기에 금덩어리나 다이아몬드가 있는데 흙덩어리나 돌덩이로 알고 있다가 이것이 흙덩어리나 돌덩이가 아니라 다이아몬드요 금덩어리다 하고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금덩어리나 다이아몬드를 우리가 모르고 흙덩어리나 돌덩이로 알고 있다고 해서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알고 있어서 우리가 그렇게 사용할 따름이지 실지는 금덩어리가 변하지 않았고 다이아몬드가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님이 보신 바처럼 진리자체인 것입니다.
무상보리 자체입니다. 반야바라밀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봐서는 모두가 나와 더불어 조금도 차이가 없는 여래장이 구족한 자이며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함께 지니고 있는 자인 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만인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보지 않고 착각을 일으켜서 ‘나는 범부다. 나는 육체생명이다. 육체환경조건이 맞아야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일정한 시간 가운데서 생멸을 고집하고 있는 유한 고난에 엉킨 존재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착각이 문제이지 인간 그 자체가 죄인이거나 악인이거나 못난이거나 불행한 존재이거나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부처님 깨달음 자체에 근거해 보면 만인은 절대의 죄인이 아니며, 절대의 악인이 아니며, 절대 무능한 자가 아니며, 절대 불행해야 할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의 완전한 공덕을 지니고 있는 자인만큼 완전한 지혜와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위신력을 발휘해서 온 나라 가는 곳마다 처처에 불국토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이 본래 인간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것은 미혹해서 그런 것입니다. 미혹이 딴 것이 아니라 착각인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수행해서 깨달아야 한다 그럽니다. 깨달아 가지고 마치 흙덩어리가 차차 돌덩이가 되고, 돌덩이가 되어 가지고 금덩어리가 되고, 금덩어리가 되어 가지고 다이아몬드가 된다는 식으로 점점 바뀌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대로 불성 완전한, 여래장 완전한, 반야바라밀 생명 완전한,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완전한 그것이 본래 그대로 있는 것을 모르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가 잘못하는 생각을 돌이킨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어떤 친구가 있어 미움을 가지고 대립적인 존재로 알고 있다가 우연히 고향에 갔다가 그 친구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려서 집을 나와서 형제를 몰라봤는데 알고 보니까 원래는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였습니다.
집에 가서 고향을 찾아 봤더니 분명 형제였던 것처럼 바로 만인은 진리 자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즉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범부가 범부가 아닙니다. 말로는 이름을 범부라고 그러지만 범부가 범부가 아니라 그 이름이 범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범부가 아니라는 말은 무엇인가? 바로 법성진여 자체 즉, 진리자체인 것입니다.
이 점을 봐서 일체 중생, 일체 범부, 일체 존재가 궁극적인 진리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오래 닦아 가지고 닦은 데 따라서 뭔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이대로 여기 있는,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성 있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이제까지의 업적을 가지고 또 미래에 해야할 것까지 있는 그대로 본래 변할 수 없는 완전무결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몰랐기 때문에 이제까지 흙덩어리로 알았기 때문에 나는 흙덩어리다. 육체인간이다. 물질의 공급으로 유지하는 생명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먹어야 살겠다 하고 먹기 위해서, 얻기 위해서, 물질을 축적하기 위해서, 그리고 안전을 더욱 확보하기 위해서 온갖 투쟁과 노력을 했지만 바로 자기가 무한 실력자다. 무한의 위덕을 갖춘 사람이다. 이웃이 이웃이 아니라 남이 아니라 모두 함께 하는 한 몸이다. 한 생명이다. 함께 맥박을 같이하고 호흡을 함께 하는 존재다 하고 알아 볼 때 사뭇 그 사람은 진리 자체로 복귀한 것입니다.
복귀한 것이 아니지만 복귀한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는다는 것은 본래의 것에 바로 눈뜨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보다 확고히 이해를 해야 합니다.
돈오(頓悟)냐, 점수(漸修)냐 하고 우리 불교에서 단번에 깨쳐서 단번에 무상도를 이루는 돈오돈수(頓悟頓修)냐, 깨닫기는 단번에 깨달아 가지고 차차 오래오래 닦아 가는 돈오점수(頓悟漸修)냐 하는 것이 우리 불교계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 뉴욕의 스토니 부룩의 교수이신 박성배 교수가 와서 보조 선사의 중심사상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해 주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돈오점수에 관한 얘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보조 선사의 사상에 대해서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돈오점수는 우리는 졸업했습니다.
본래 청정이고 본래 완성이고 본래 반야바라밀 생명입니다. 본래 반야바라밀 생명, 본래 청정, 본래 진실은 그것을 쓰고 사는 것이 보현행원입니다.
우리는 본래 진리대로 살고 진리로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깨닫고 못 깨닫고 차차 이루고 그런 것은 우리는 끝났기 때문에 그런 얘기는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보조 스님의 사상이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 저술을 보면 점차 초기의 법문 예를 들어서 「정혜 결사문」이라든가, 「수심결」이라든가, 「진심직설(眞心直說)」이라든가 하는 저술이 있지만 그것은 일시에 나온 것이 아니고 점차 나온 것이지요. 그러나 최후에 나온 것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또 때로는 「간화 결의론」을 실토해 냈다고 합니다마는 어쨌든 원돈성불론입니다.
원돈성불론을 중심해서 보조 선사의 중심사상을 말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우리 불자들은 마음 속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반야바라밀입니다.
장차 닦아서 반야바라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런데 이 반야바라밀의 무한의 위신력을 갖고 있는 것을 잊고 착각을 해서 딴 생각을 하고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누으나 오나 가나 마하반야바라밀을 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하반야바라밀을 외우고 있는 그 자체가 반야바라밀입니다. 부처님 일체 제불, 일체 중생, 자체입니다. 만인이 그것을 가지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는 그것을 알고 그에 따라서 그 진실대로 행동하고 생활해서 생활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어서 평화의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불자들이 한 사람의 수행에서 시작해서 한 나라 한 사회를 밝히고 나아가 세계를 밝히고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부처님의 진리를 직접으로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자신이 갈 겁니다.
업장 참회를 해서 범부 속에서 서서히 때를 벗기는 것처럼 벗긴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지난번에 무상보리를 얻는 원인 네 가지를 배우는 『무상의경』의 대목에서 첫째는 대승법, ‘일체 중생과 성불하여지이다.’하는 대승의 법을 닦을 것, 그 다음 반야바라밀을 닦을 것, 그 다음은 반야바라밀을 닦는다고 해서 일체가 없다고 비었다고, 무라고, 그래서 무가 진리인 것처럼 알고 있는 그런 허공삼매, 그 허공삼매를 깨버리는 파허공삼매를 닦을 것, 그리고 대자비를 행할 것, 이 네 가지가 무상보리를 이루는 길이다 하는 것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가운데서 핵심적인 것은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바라밀을 통해서 우리의 범부성이 일시에 깨져 버리고, 중생의 한계성이 일시에 무너져 버리고, 중생이 가지고 있는 빈약성이 일시에 완전하게 되어서 일체 중생과 더불어 동일법신, 모두가 한 몸인 것을 깨달아서 서로 자비심으로 주고받고 따뜻하게 엉기고 사는 이것이 대자비입니다.
이렇게 반야바라밀을 알아서 자비를 행하는 것, 이것이 무상보리를 이루는 길입니다. 우리 불자는 항상 반야바라밀을 원하고, 만인 신성 존엄 절대 가치를 말하고, 자비를 실천하며, 서로 존중하고 받들고 섬기며, 찬탄하고 위해 주자는 것이 바로 이러한 데에 있는 것을 형제들은 다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