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내가 미국에서 머무를 때 병원에 입원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 곳에 있는 많은 의사들이 몸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특정한 명상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주치의가 이런 종류의 명상을 하면 심장이 빨리 회복될 것이라고 말해주어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해도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치료하는 데는 통상 2~3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명상을 하여 1주일만에 회복되었고, 의사들도 매우 놀라며 기뻐하였습니다. 의 사들이 말하기를 많은 의사들이 명상을 선호하는 것은 무엇보다 환자들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몇몇 의사들이 명상에 대하여 좀 더 깊이 배우기를 원하고 따로 약속을 정해서 내 병실을 찾아 왔기에, 선(禪)을 조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에게 ‘몸을 치유하는’ 명상은 일종의 집중요가명상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런 명상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올바른 공부는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요가명상은 여러분의 몸을 쉬게 하고 건강하게 해줍니다. 어떤 요가 수행자들은 조용한 곳에 앉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백 년 혹은 천 년의 장수를 누리기도 합니다.
이렇듯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결국엔 모두 죽고 마는 것입니다.
올바른 공부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자유(自由)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삶과 죽음이 있지만, 참된 자기(自己)에게는 삶과 죽음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참된 자기를 찾는다면, 한 시간이나 하루 또는 한 달 후에 죽는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몸을 치유하는’ 명상만을 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몸에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의 몸이 죽어버릴 때 이런 종류의 명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런 종류의 명상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이런 종류의 명상은 올바른 공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올바른 공부를 한다면, 어느 때 병이 들어도 OK, 고통을 겪어도 OK, 설사 죽는다 하여도 OK,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순간 순간마다 청정한 마음을 지키면 어디에서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얼마나 믿습니까? 다른 이들은 얼마나 돕고 사십니까?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물음입니다. 참다운 마음 공부는 여러분이 자신의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내 옆의 침대를 쓰는 이에게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이는 훌륭한 직업, 좋은 가족, 멋진 아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그를 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었지요.
그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그런 이해가 그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禪)이란 이런 ‘아무 것도 없는, 바로 그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무심(無心)의 마음을 증득(證得)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일까?’라고 물어 보아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말로써 답변을 한다면, 그것은 단지 생각일 뿐입니다. 당신은 아마 “나는 의사입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환자와 함께 있으면서 “나는 훌륭한 의사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환자의 상태를 감지할 수 없게 되는데, 그것은 당신이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란 그저 이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병원에 있던 그 환자의 경우처럼, 이해한다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만약에 모른다면, 모르는 채 곧바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모르는 마음은 생각을 끊어 버립니다. 그것은 생각 이전입니다. 생각 이전에는 의사도, 환자도, 그리고 하느님도, 부처님, ‘나’도, 언어(言語)도, 아무 것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우주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무심(無心)이라 부르기도 하고 원점, 본래의 자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하느님이나, 우주적 기운, 희열이나 적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이 말들은 그저 가르치기 위해 쓰는 말일뿐입니다. 무심(無心)이란 언어 이전입니다.
선(禪)이란 무심을 증득하는 것이고, 무심한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무심을 쓸 수 있을까요? 무심을 대자비의 마음으로 만드십시오. 무(無)란 ‘나’라는 생각과 장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마음을 일체 중생을 위해 행하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무심은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참다운 마음 공부를 한다면 이 무심은 강해지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백히 지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끊어낸다면 당신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 것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집니다. 순간 순간 당신은 올바른 상황을 지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만일 ‘나 – 나의 – 나를’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환자와 하나가 된다면, 비로소 환자를 도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사가 가족과 함께 할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을 100퍼센트 지닐 수 있다면 가족을 위한 최선의 일이 무엇인지 확연히 알게 됩니다. 이렇게 즉여(卽如)할 뿐입니다.
청산(靑山)은 움직이지 않는데
흰 구름 제 스스로 오가는구나
의사들은 선을 좋아합니다. 그들이 모두 수행에 정진하기를!
오직 모를 뿐인 마음으로 곧바로 나아가 무심을 증득하고, 무심을 써서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제도해 주시길 빌어 마지않습니다.
崇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