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三寶)

불교는 불. 법. 승 삼보로 구성되어 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그러면 삼보는 무엇을 삼보라고 하는가.

먼저 불보(佛寶)란 무엇인가?

불자가 믿고 존경해야 할 성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적(情的)인 신앙이다. 모든 믿음은 감정에서 우러나오며 또 그것은 곧 감정을 순화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을 깊이 하는 사람은 감정이 평화롭고 아름다워진다. 세상에는 많은 고통이 있지만 그 고통을 이겨내는 힘은 바로 감정에서 오기 때문이다.

모든 고락(苦樂)은 감정에서 좌우된다. 감정이 정화되면 고통을 받더라도 상관없다, 화가 난다고 하는 것은 곧 감정이 움직이냐 움직이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어떠한 경지라도 동요 없는 믿음이 형성되면 욕도 음악 소리로 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신앙을 통하여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다음 법보(法寶)는 ‘왜 믿어야 하느냐’하는 그 철학적인 이론적 근거를 말해 놓은 것이다.

인생을 진리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 법을 깨달은 부처님을 믿고 존경하는 것이다. 법에는 하나에서 열로 퍼져 나가는 연역적(演繹的) 연기법(緣起法)이 있고, 열 개에서 하나로 귀결시키는 귀납적(歸納的) 실상법(實相法)이 있다.

이것은 모두가 견(見). 문(聞). 각(覺). 지(知)를 통하여 해오(解悟)하는 것이다. 잘못된 어리석은 마음을 깨우쳐 나가는 것이 법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보는 종교를 철학적. 지적. 심리적 사상으로 전개하여 개발된 지혜로서 진리를 이해해 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계 놀이를 하다가 돈을 떼어 먹었다고 하자. 계주는 그 떼 먹은 돈을 해주느라 안간힘을 썼다. 돈 주고 고생하며, 또 자기를 배신한 것을 생각하면 속에서 불이 난다.

“고년, 고년이 내 돈을 떼어먹어. 좋게 죽지 못할 것이다. 벼락이나 떨어져라”하고 갖가지 원망과 욕설로써 한바탕 화를 내다가 나중에는,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가슴이야” 하고 가슴을 친다.

자, 그렇다고 해서 돈 떼 먹은 여자가 “계주님 안됐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고 와서 비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너 이년, 나를 두고 이런이런 욕을 했지. 두고 보자. 고생 좀 해야 돼. 그까짓 돈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욕해” 하고 도리어 화를 낸다.

그러니 죽도록 화를 내고 통곡을 하여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원성이 풀리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병만 더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애초부터 계라는 것을 하지도 않지만, 하다 떼였다 할지라도 “에라, 한 생각 돌려먹자. 전생에 그년한테 졌던 빚 갚은 거지 뭐” 하고 한 생각 돌리면 생각 자체가 평온해진다.

해도 안 해도 소용없는 생각들로 가슴을 찧고 고통을 파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지혜로 돌려 진리로 나가는 것, 이것이 법보이다.

다음 승보(僧寶)는 부처님과 법을 통하여 순간순간 자기의 모든 것을 반성해 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불도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와 남, 부모, 부부, 자식, 형제, 국가, 사회에 있어 올바른 관계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올바른 관계란 무엇이냐?

곧 자기의 인과를 지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길을 걸어야지. 찻길이나 말이 다니는 길을 걸었다가는 사고가 나 죽게 된다. 이것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것은 자기 의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그 의지를 선적(善的)인 면에서, 계율적(戒律的)인 면에서 실천하여 간다 할지라도 오직 나만을 위해서 착한 계율을 지키면 다른 사람을 악한 길에 빠뜨리게 되고 세상을 악하게 만드는 수가 있는데, 반대로 남을 위해서 착한 마음을 갖는다 하면 이것은 그 뜻이 훨씬 대승적인 면으로 발전하여 간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대승적 승가생활과 소승적 승가생활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삼보는 여러 측면에서 이해를 달리할 수도 있다.

예컨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삼보, 즉 시방삼세의 등상불과 3장(臧) 12부(部)의 법보와 비구·비구니의 스님들을 삼보라 하는데 그것은 전문용어 ‘현존삼보(現存三寶)’라 한다.

예컨대 그 모든 부처님과 법보 가운데서도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가 설한 팔만대장경 법보, 그리고 그의 제자인 4부 대중만을 총칭할 때는 ‘실존삼보(實存三寶)’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 실존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삼보들은 결국 모든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과 그 마음의 빛, 결점 없는 행동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음이 깨끗한 것을 불보(心淸淨曰佛), 마음의 밝은 빛을 법보(心光明曰法寶), 마음에 걸림없는 것을 승보(心無碍曰僧)라 한다.

이것을 ‘일체삼보(一切三寶)’라 부른다.

소승불교인들은 주로 실존삼보를 신앙의 표본으로 삼고 있지만, 선불교에서는 일체삼보를 선행의 표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외형상의 삼보보다는 내용상의 삼보를 더욱 깊이 신행하고 있는 것이다.

崇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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