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분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불교 구성의 3대 요소인 불·법·승 삼보를 중심으로 구분할 수도 있고 불교 교리 발달사의 측면에서 원시불교·소승불교·대승불교로 구분하여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 교학적인 따분한 이론적 분석보다는 내용적인 현실을 감안하여 소승불교는 소아(小我)를 깨달은 것이고, 대승불교는 대아(大我)를 깨달은 것이며, 선은 한마디로 무아(無我)를 깨달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소승불교는 모든 법의 체(體)·상(相)·용(用) 가운데 체(體)·상(相)만을 보고 상불교(相佛敎)를 무시하며 체세계(體世界)에 돌아가게 한 불교인 까닭이고, 대승불교는 그 모양을 보지 않고 무엇에 쓰느냐 하는 것을 본위로 하여 작용불교(作用佛敎)를 중점적으로 실천한 데 반하여, 선불교는 체와 상과 작용을 동시에 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주장자를 예로 든다면 소승불교에서는, “주장자란 무엇이냐?”할 때 “주장자는 나무 작대기인데 겉모양은 이렇고, 속모양은 이렇게 생겨서 결국 한줌의 탄소가 집합된 것이므로 불에 태우면 한줌의 재가 되고 만다.”고 설명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그 체나 모양은 말하지 않고, “주장자는 주로 짚고, 끌고, 법문하고 할 때 길잡이가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선불교에서는 “이것이다 저것이다”하는 관념적 분별심 자체를 여의어서 그 주장자를 보고 마음을 일으킨 사람의 마음을 들어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소승불교에서는 인생을 놓고 볼 때 “왜 사느냐, 사는 자체가 고통이 아니냐. 그렇다면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헤어나야 하지 않느냐. 헤어나려면 근본(하느님)으로 돌아가 영원한 세계에 안주하여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귀납적(歸納的) 방법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 돌아갈 방법과 모습을 매우 중요시하여 250계와 500계를 중시하는 물리적 종교를 형성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쁜 짓을 하지 말라. 좋은 일만 하라 마음을 깨끗이 가져라 더럽게 가지면 못 쓴다”고 하며 교훈적 종교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그러한 형식(모양)보다는 오히려 내용을 더욱 중시한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는 “왜 죽였느냐?”고 하는 것을 문제 삼지, 죽인 그 자체, 즉 악을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간음한 사실에 있어서 그 사실을 죄악시하는 것보다는 그 동기를 더욱 중시하는 것이다. 똑같이 사람을 죽였는데도 경찰이 정당방위를 위해서 죽인 것은 죄악시하지 않는데 도둑놈이 살인 강도한 것은 큰 죄로 다스리고 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는 “그른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는 “바른 일만 하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내 자신의 성불보다는 중생들의 성불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그 선이니 악이니 하는 말에 팔리지 말고 선심과 악심을 일으키게 된 동기부터 그 마음속 깊은 곳으로 자각심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에 대한 관념은 벌써 2·3차적인 것인데 반하여 그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마음은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한파도가 일어나면 많은 파도가 이는 법이라 파도가 난 뒤에 그것이 좋은 파도냐 나쁜 파도냐 하는 것보다는 애초부터 파도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또 이미 난 파도를 가라앉히려 애쓰기보다 파도가 곧 물이요, 물이 곧 파도인 도리를 깨달아 파도와 물에 흔들리지 않고 물에 들면 물, 파도에 들면 파도를 따르되 물이 높으면 높게, 파도가 얕으면 수파축랑(隨波逐浪)하는 것이 그대로 선불교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지역을 구분하여 인도·태국·네팔 등의 동남아 불교는 소승불교이고, 중국·한국·미얀마·베트남·일본 등의 불교는 대승불교라 하고, 선불교는 한국과 중국·일본에만 남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추상적이며 관념적 불교관이다.
왜냐하면 소승권내의 불교도 가운데도 대승심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고, 대승권 안에 있는 불교도 가운데도 소승심을 버리지 못한 자가 있으며, 선불교를 하는 사람 가운데도 대·소승불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구분은 그 형태·형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나타낸 사람들의 마음자세를 깊이 판단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모든 불교는 똑같이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여 가는 데 있어서 명확한 목표가 있다. 그 목표를 중심으로 구성된 형태가 불(佛)·법(法)·승(僧) 삼보이다.
이것을 보배라고 하는 것은 세속의 보배들이 인간의 물질적 가난을 제거하여 주듯 이 삼보는 인간의 정신적 가난을 제거하여 주는 까닭이다.
崇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