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나는 것이고 春來草自生
청산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靑山自不動
백운은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것이다. 白雲自去來
봄이 오면 풀이 저절로 나므로 중생이 오면 근기를 따라 대접하고, 청산은 동요가 없으므로 마음은 동요가 없다.
동요 없는 마음이 바람을 만나면 흰 구름처럼 인연 따라 동서로 윤회한다.
옛날에는 가고 싶지 않은 곳에 억지로 끌려 다녔고 나고 싶지 않은 곳에도 억지로 나서 살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그 입을 마음대로 돌리고 다니면서 삼계의 귀한 손님노릇을 한다.
굴리느냐 구르느냐,
그대들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마장동 도살장에 가보면 수 없는 소들이 “음매 음매”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들어온다. 일평생 여물죽을 먹고 논과 밭들을 다니며 갖은 고통을 겪었던 소들이 이제 마지막 몸 바칠 곳을 향해 보보등단(步步登壇)한다.
그러나 어떤 소는 대담하게 매를 맞을 필요도 없이 제발로 걸어 들어가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죽지 않으려 몸부림 쳐도 죽지 않는 것이 아닌데 죽는 마음, 그것 하나 때문에 공포의 눈물이 육신을 적신다.
가련한 인생.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과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문자에 팔리고 이름에 팔리고 재산에 목 메인 인생들은 분별 속에서 죽어간다.
그러므로 조주스님은 불법을 물어오는 사람에게 차나 마시고 가라고 하였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차나 마시고 가게(喫茶去).”
“스님, 마음이 무엇입니까?”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
“도가 무엇입니까?”
“차나 한 잔 마시게.”
아니면 불법을 물을 때마다, “다리 밑을 내려다보라”고 하였던 것이다.
네 앞도 모르는 놈이 부처를 알아 무엇하며 불성을 알아 무엇하려는 것이냐는 말이다. 돌아볼 일이다.
나의 다리 밑을.인생은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어느 곳으로 가느냐 하는 문제는 동서고금 모든 사람들의 화제였다.
그러나 우리의 고인 가운데 나옹 스님의 누님이 있었다. 동생에게 염불을 배우고 난 후 스스로 한 글귀의 시를 읊으니 다음과 같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空手來空手去是人生
날 때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고 生從何處來
갈 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死向何處去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 듯하고 生也一片浮雲起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같네 死也一片浮雲滅
뜬구름은 자체가 실이 없나니 浮雲自體本無實
생사 거래도 모두 이와 같도다 生死去來亦如然
홀로 한 물건이 있어 항상 홀로 드러나 獨有一物常獨露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네. 淡然不隨於生死
참으로 명시다.
나는 것을 한탄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을 슬퍼하지도 않고 오고 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또한 그 가운데 생사 없는 도리를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시를 보고 잘 되었다, 못 되었다 평가할 것이 아니라 이 속에 들어 있는 문제 하나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홀로 한 물건이 있어 항상 드러나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생사를 따르지 않는 담연한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아는 자는 뜬구름을 원망하지 않으리라.
만나고 헤어짐을 기약하지 않으리라.
기약이 없는 세계에 나아가려면 바로 그것을 보라.
그것을 보는 자가 곧 부처님이니라.
崇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