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우리는 여러 가지 기도법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그 방법과 원리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다.
하지만 기도는 긍정적인 면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다 보면 때때로 뜻하지 않게 장애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게으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새로운 경계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앞일이 보이기도 하고 남의 운명이 그대로 비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없었던 능력이 자기도 모르게 생겨나면 한편으로는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흥미롭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경계에 빨려 들어가는 수가 많다.
이때가 문제이다. 이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번뇌 때문에 일렁거리던 자기의 마음이 맑아져서 이제까지 비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비치는 것일 뿐, 아직은 완전히 맑아지고 밝아진 경지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스스로의 자세를 더욱 가다듬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불가에는 ‘금강수보살’을 열심히 외우면 금강수보살이 친히 나타나서 견성을 시켜 준다는 말이 전하여지고 있다. 현재 생존하고 계신 스님은 그 말을 듣고 ‘금강수보살’을 부를 것을 작정하였다. 스님은 밤잠도 마다하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열심히 ‘금강수보살’을 불렀다. 그런데 50일이 지나자 금강수보살이 나타나 법문을 들려준 다음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계행을 잘 지키고 있느냐?”
“예, 잘 지키고 있습니다.”
“몸으로 계행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 계행을 잘 지켜야지!”
“예?”
“이놈아, 아직 도를 이루기에는 멀었구나. 속에 여자 생각이 꽉 차 있는데 어떻게 도를 이루겠느냐?”
실로 어려서 출가한 그 스님은 여자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가끔씩은 ‘여자와 함께 살면 어떠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매혹적인 여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면 홀로 있을 때 은근히 그리워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나타난 금강수보살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도를 이룰 수 있습니까?”
“너의 성기를 끊어 버려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그 스님은 칼로 자신의 성기를 끊어 버렸다. 순간 금강수보살은 눈앞에서 사라졌고, 도를 깨치기는커녕 불구에 정신마저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금강수보살이 아니라 마(魔)의 유혹에 빠져든 것이다.
그 뒤 그 스님의 은사(恩師)가 찾아가 참선을 지도하자 마의 장애에서 깨어났고, 다행히 지금까지 중노릇을 잘하고 있다.
우리 불자들은 기도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아서 꼭 필요한 기도를 해야지 허황된 기도를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기도를 하다가 나타나는 경계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앞일을 알기 위해 한 기도가 아닌데 앞일이 보인다고 현혹될 것이 무엇인가? 남의 운명을 보기 위해 한 기도가 아닌데 남의 운명이 보인다고 떠들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마장(魔障)이다. 이 마장을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이때 더 힘을 기울여 유혹 당함이 없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가 맑아지고 있고 업이 녹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일 뿐이다. 다 녹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 맑아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때 더욱 열심히 자기의 소원으로 들어가 기도하면 좋은 결실을 이룰 수가 있다. 곧 새로운 경계가 나타나면 ‘내가 분기점에 와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야 한다.
실로 기도를 하다가 마음이 딴 데로 팔리고 톱니바퀴가 헛돌아 신기(神氣)가 드는 사람도 많다.
내 나이 40세 무렵, 여행을 하다가 조그마한 무당 절을 잠시 지나치게 되었는데 마침 안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네 아들은 지금 부산의 어느 식당에서 일을 보아주고 있구나.”
‘허, 관세음보살 귀신이 단단히 붙었구먼.’
이렇게 생각하며 모른 척하고 소리쳐 불렀다.
“주인 계십니까?”
방문을 연 점쟁이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넙죽 엎드렸다.
“아이구, 큰 관세음보살님! 큰 관세음보살님!”
나는 자리에 앉으며 계속 점을 보라고 하였다.
“더 계속하십시오.”
“저는 모릅니다. 저는 모릅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인가? 어찌 관세음보살에 큰 관세음보살이 있고 작은 관세음보살이 있을 것인가?
오로지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소원을 축으로 삼아 기도의 대상인 불보살과 기도하는 자기의 톱니바퀴를 잘 맞추면서 기도를 해야만 한다. 순수한 마음, 간절한 마음,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가피가 저절로 따르고, 허황한 욕심과 잘못된 믿음으로 기도를 하면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기도하는 틈틈이 자기의 마음을 돌아보면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삼매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불보살의 가피가 찾아들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기도에 임하기를 당부 드리면서 한 편의 이야기로 끝맺음을 하고자 한다.
옛날, 지극한 마음으로 극락세계에 가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극락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물었고, 그 방법만 일러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했다.
마친 땡추중이 이 말을 듣고 그 어리석은 사람을 불렀다.
“10년 동안 내가 시키는 일을 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 극락에 보내 주마.”
그 사람은 땡추중의 지시라면 입안의 혀처럼 극진히 행하면서 틈틈이 염불을 하였다. 10년이 지나자 땡추중은 부자가 되었고, 그 사람은 이제 극락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땡추중은 그 사람을 데리고 산 위의 절벽 꼭대기로 갔다. 그리고 소나무 위로 올라가 두 손으로 가지를 잡고 매달리게 했다.
“이제 한 손을 놓아라.”
“한 쪽 손도, 마저 놓아라.”
“나무아미타불을 외워라.”
그 사람은 수천 길 낭떠러지 속으로 떨어지면서 크게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다.
바로 그 순간, 사방에서 오색구름이 나타나더니 떨어지는 그 사람을 태우고 가 버리는 것이었다.
땡추중은 기가 막혔다. 자기의 능력이 탄로 나서 10년 동안 벌어 준 재산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 죽이려 한 것인데 극락으로 가 버리다니……. 땡추중은 자신의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착각과 함께 자신도 극락으로 가고자 소나무 위로 올라갔다.
“한쪽 손을 놓아라.”
“다시 한쪽 손을 놓아라.”
“나무아미타불.”
땡추중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매우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바로 일심기도법(一心祈禱法)이다.
실로 일심기도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없다.
지극한 마음으로 법답게 기도하면 반드시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우리 불자들이 참된 기도법에 의지하여 부지런히 기도 정진함으로써 마음을 맑히고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남김없이 소원을 성취하게 되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日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