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1. 도(道) 닦을 기회는 지금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자리 주인공이 만들어낸다. 이 마음이 부처도 만들어내고 중생도 만들어내고, 천당도 지옥도 만들어낸다. 이 마음이 씨앗이 되고 작용을 하여 모든 것을 창조한다. 나와 너뿐만이 아니라 크고 작고, 길고 짧고, 착하고 악하고, 아름답고 추하고, 친하고 성글고, 살고 죽고, 성하고 쇠한 중생세계가 쫙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겉모습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껍질을 덮어쓰게 된다. 돼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돼지가 되고, 호랑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호랑이가 되고, 모기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모기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인 아난존자가 조용히 앉아 있을 때, 모기 한 마리가 ‘앵’ 하며 날아와 뺨에 붙었다. 그런데 이를 쫓는다고 건드렸더니 모기가 그만 죽어버렸다. 아난존자는 죽은 모기를 손바닥에 놓고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염불을 하다가, 모기의 전생을 관하여 보았다.

그 모기는 삼생 전 인도 천지를 뒤흔들던 대장군이었다. 그러나 장군은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사람이었다.

특히 왕에게는 지나친 아부를 하였다. 그 결과 장군은 다음 생에 기생의 팔자를 타고 태어나 뭇남성들에게 갖은 애교를 떨며 돈을 모았고, 남자들의 진액을 빨아들이며 한평생을 보내다가 죽었다.

마침내 다음 생에는 ‘앵-‘ 간드러지는 소리를 내며 날아들어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살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사람의 몸을 받았다. 생각하는 사람,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때를 결코 놓쳐서는 안된다. 바로 이때 마음을 좋고 또 좋게 써서 보다 높은 삶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실로 사람들은 도를 닦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얽히고 설킨 세상일에 묶여서 도를 닦지 못한다. ‘이번 한번만’, ‘이 일만 끝나면’ 하면서 다음으로 미루다가 어느날 갑자기 염라대왕의 부름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음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끝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앞의 애착을 용기 있게 끊어 버리지 못한다. ‘이번만 하고 다시는 안 해야지’, ‘오늘까지만 하고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수없이 하지만, ‘제2’의 일은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히말라야의 설산에 집 없는 새가 살고 있었다. 낮에는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이 가지 저 가지로 옮겨다니면서 즐겁게 놀지만, 밤만 되면 추위에 떨면서 결심을 한다.

“아이, 추워. 내일은 반드시 집을 지어 따뜻하게 잠을 자야지.”

그러나 날이 밝으면 간밤의 고생과 다짐은 모두 잊어버리고, 다시 노래하고 과일을 따먹으며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또 밤이 되면 어김없이 스스로에게 맹세한다.

“내일은 놀지 말고 일어나자마자 집부터 지어야겠다. 바닥은 단단한 것으로 하고, 벽은 길상초로 바르고, 지붕은 커다란 잎으로 잘 덮어서 내일부터는 고생을 면해야지.”

그러나 아침이 되면 다시 어제와 다름없는 반복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평생 동안 집을 짓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집이 없는 새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히말라야의 집 없는 새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도 내일을 기약하면서 속절없이 한 생을 마치고 만다.

“오늘은 헛되이 하루를 보냈지만 내일부터는 잘하면 될 것이다. 금년에는 이 일 저 일로 번뇌가 많았지만 내년부터는 열심히 용맹정진할 것이다.”

도가 높은 스님에게 불교 신도인 속가의 친구가 있었다. 스님은 어느날 친구인 장조류를 찾아가서 간곡히 권하였다.

“여보게. 자네도 이제 죽을 때가 그리 멀지 않았으니 발심하여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라네. 단, 내가 세 가지 중요한 일이 남아 있어서 그 일만 마치면 곧 할 생각이네.”

“그 세 가지 일이 무엇인가?”

“첫째는 지금 하는 일로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아들 딸 모두 좋은 데 혼인을 시키는 것이고, 셋째는 아들들이 출세를 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네.”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그렇게 하게나.”

그런데 장조류는 세 가지를 다 이루기도 전에 죽어버렸고, 스님은 문상을 가서 조문을 지었다.

나의 친구 장조류여
염불 권하자 세 가지 일을 마친 후에 한다고 했지
염라대왕 그 양반도 분수가 어지간히 없네
세 가지 일을 마치기도 전에 갈고리로 끌고가다니

스님의 조문은 염라대왕을 나무라는 듯이 지었지만, 대왕은 곧 나의 업이므로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다. 부질없는 세상 애착에 끄달려 마음 닦는 공부를 내일로 내일로 미루다가 덧없는 뜬 목숨을 마치고 마는 것이다.

세상일은 번뇌가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세상일은 끝이 없고, 끝없는 번뇌가 만들어낸 세속의 일이기에 중생들은 버리지를 못한다. 오히려 이런저런 잔꾀를 내어 끝없이 계획하고 일을 저질러버린다. 열심히 공부만 하고 일을 잘하던 사람도 돈이 생기면 ‘이것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쓸까?’ 하면서 끝없는 궁리를 펴게 된다.

꾀라는 것은 끝이 없어서 아무리 ‘이것만 하고 공부해야지.’ 하고 결심을 해보아도 꾀에는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바로 이 순간이 가장 좋은 때요, 이 자리가 가장 좋은 장소인 것이다.

옛 스님들은 말씀하셨다.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 눈먼 거북이 구멍 뚫린 나무는 만나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을…

맹구우목! 천년에 한번씩 바다 위로 나와 바람을 쐬는 눈먼 거북. 그렇지만 눈이 멀어 며칠 허우적거리다가 걸리는 것이 없으면 도로 물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침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나무토막 하나가 파도를 타고 떠내려와서 거북의 몸에 걸리게 되면, 거북은 얼마 동안 편안하게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맹구우목의 이야기이다.

이 얼마나 드문 일인가? 이처럼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려운 일이요,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 우리는 부처님 법까지 만났다. 그렇지만 열심히 도를 닦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곰곰히 생각해보라. 우리의 인생은 그다지 긴 것이 아니다. 오늘 하루 편안한 것으로 만족할 일이 아니다. 어렵고 힘든 일, 특히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 다가오면 그 어떠한 것도 힘이 되어주지를 못한다. 내가 지은 업만이 나를 따를 뿐이요, 힘써 닦은 도의 힘만이 나를 구원해줄 수가 있다.

우리나라 선종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는 경허선사는 14세에 출가하여 동학사 만화대강사 밑에서 경전을 공부하였고, 23세의 어린 나이에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추대되었다.

경허스님은 모든 학인들의 추앙을 받으면서 8년 동안 편안한 생활을 하다가, 어느날 문득 은사 계허스님이 그리워져 여행길에 올랐다. 스님이 어느 마을에 접어들자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스님은 인가를 찾아 대문을 두드렸다.

“갑자기 비를 만나서 그럽니다.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없겠습니까?”

“아니 되오.”

주인은 박절하게 거절하고 문을 꽝 닫아버렸다. 또다른 집의 대문을 두드렸으나 이번에는 문도 열어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세번째 집에서는 노인 한 분이 나와 점잖게 타일렀다.

“스님, 이 마을에서 묵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오.”

“왜요?”

“지금 이 마을에는 악성 돌림병이 유행하고 있소. 그 병에 걸린 사람은 영락없이 죽으니 어서 빨리 떠나시오.”

그 때 반대편 집에서 장정이 송장을 업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경허스님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가 쭈뼛서는 것을 느꼈다. 이제까지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죽음의 환상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얼른 마을을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멀리는 갈 수 없었던 스님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정자나무 아래에 서서 그 마을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죽음의 성과 같이 느껴졌고, 금방이라도 유령이 튀어나와 덮칠 것 같았다. 스님은 하룻밤 내내 정자나무 아래 선 채 죽음의 공포와 싸웠다. 그리고 가사 장삼 걸치고 부처님 전에 예배 드릴 때의 거룩함도, 학인들을 가르칠 때의 위엄도 모두 헛것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죽은 후에는 어디로 가는가?’

생사에 대한 의문은 끝없이 이어졌고, 마침내 스님은 결심을 굳혔다.

‘생사일대사.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생사를 넘어서는 공부를 해야한다. 공부를!’

날이 밝자 스님은 동학사로 돌아와서 학인들을 모든 다음 강원의 해산을 선포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무엇을 배우려 하지 마시오. 나의 가르침은 살아 있는 가르침이 아니오. 이제부터 나는 나의 문제와 목숨을 건 대결을 하고자 하오.”

그날부터 스님은 문을 걸어 잠그고 뼈를 깎는 참선정진을 시작했다. 턱 밑에 뾰죽한 송곳을 세워 졸지 못하도록 하였고, 망상이 판을 치면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며 화두를 새겼다.

치열한 용맹정진을 시작한 지 불과 석 달째 되던 날, 시봉을 들던 제자 원규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로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하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겨 그 뜻을 물어왔다. 순간 스님은 생사일대사를 해결하고 대오를 하였다. 그때가 1880년 11월, 경허선사의 나이 31세 때였다.

경허스님처럼 죽음을 생각해보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해보라. 금생을 놓치면 도를 닦을 기회는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 도를 닦지 못하고 헛되이 죽어버리면 다시 사람의 몸을 받더라도 도를 닦을 인연이 주어지지 않는다.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의 법에 의지하여 날마다 새롭게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참선, 염불, 기도, 경전 공부, 그 무엇이라도 좋다. 자기의 형편에 맞는 수행법을 정하여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정진하여야 한다.

자세가 흩어지면 처음 도심을 일으켰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하여 보라. 항상 시작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정진해 보라. 이렇게 정진하다보면 틀림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고, 나의 자유와 함께 뭇 생명 있는 자를 제도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日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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