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을 달리 해탈을 이루게 발을 보호하는 법 – 바라제목차라고 한다.
파라, 곧 ‘이상향의 세계로 나아가는 발을 보호하는 법’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한문으로 계족이라고 번역한다.
왜 계족이라 하였는가?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발이 튼튼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팔은 하나가 완전히 없어져도 걸어갈 수 있지만 발은 다르다. 새끼 발가락 하나만 다쳐도 걷기가 힘들어진다. 이와같이 계율은 해탈의 이상향으로 직접 걸어서 가는 그 발을 보호하는 것이요, 계율 그 자체가 발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법을 존경하고 잘 가지라고 한 것이다.
그럼 이 계를 잘 지킬 때 어떤 이익이 있는가?
수계식 때 계를 설하기 전에 외우는 <송계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계를 가지는 자는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만남과 같으며
가난한 이가 보배를 얻음과 같으며
병든 이가 쾌차해짐을 얻음과 같으며
갇혔던 이가 감옥을 벗어남과 같으며
멀리 갔던 이가 집에 돌아옴과 같으니라
마땅이 알라
이 계는 곧 대중들의 큰 스승이니라
만약 부처님께서 세상에 더 계실지라도
이와 다름이 없으리라
이를 하나하나 풀이해보자.
-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만남과 같다
이 사바세계를 살라가는 중생의 삶은 깜깜한 밤에 산길을 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발길 가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나기까지 쏟아지는 칠흙 같은 밤에 산길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한발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데 길은 어떻게 뻗었는지 보이지 않고… 반 발자국씩 내딛으며 전진은 하지만 결코 그 발끝을 믿을 수가 없다. 바로 그 순간 번갯불이 번쩍 하는데 오른쪽에 곧게 뻗은 길이 보이는 것이다.
“옳거니! 길이 바로 저쪽에 있었구나!”
이와같이 계를 가지면 어두운 인생길에서 밝음을 얻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비유하면, 수십 년 어두웠던 방이라 하더라도 촛불 하나를 밝히면 수십 년 동안의 어두움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다.
수십 년 동안 번뇌망상과 죄업속에서 살았을지라도 계를 받는 그 순간부터 밝은 삶은 보장되는 것이다.
- 가난한 이가 보배를 얻음과 같다
가난이 무엇인가?
가난은 바로 우리들 마음속의 탐욕심이다. 사람들은 흔히 가난하기 때문에 탐욕을 부린다고 하지만, 그와같이 생각하는 이는 부자가 되어도 탐욕을 버리지 못한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이 가난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이 가난은 마음이 넉넉할 때만 벗어버릴 수 있다.
아무리 맛이 있는 산해진미라도 위장이 나쁜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고, 비록 꽁보리밥에 생된장이라도 위장이 좋은 사람한테는 나무랄 데 없는 요기가 된다. 위장이 좋은 것이 보배요, 몸 건강한 것이 보배요, 속이 상하는 일을 만났을 때 웃을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가질 수 있으면 그것이 보배인 것이다.
계는 능히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준다. 올바른 신심이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어준다. 계를 지닐 때 탐욕으로 인한 가난은 저절로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은 정법의 보배로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 병든 이가 쾌차해짐을 얻음과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계는 어떤 마음의 병이라도 능히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의학은 “병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요, 약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곧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은 업이 좌우한다. 중생의 업력이 바로 천명인 것이다. 그리고 업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불현듯이 일어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심에 의해 더욱 깊이 쌓이는 것이다.
그러나 계를 받아 지니면 불현듯이 일어나는 삼독심이 저절로 고개를 숙이면서 청정한 계행과 선정과 지혜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무영업력이 아닌 해탈력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맑으면 몸이 맑아지고 몸이 맑으면 병은 자연히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찌 계를 지니는 힘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갇혔던 이가 감옥을 벗어남과 같다.
중생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감옥과도 같다. 처자권속의 인간관계로 얽혀 있고, 시간과 공간과 물질 속에서 얽매여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장소와 어느 시간도 실제로 우리를 얽어매고 있지는 않다. 단지 나 자신의 업력이 그 모든 것과의 관계를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계를 받아 지나면 이와같은 부자유는 저절로 사라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감옥이 아니라 자유의 세계로 바뀌게 된다. 삼독을 벗어난 맑은 삶, 당당한 삶, 자유로운 삶을 계율이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 멀리 갔던 이가 집에 돌아옴과 같다
이 비유 속에는 ‘멀리 갔다.’는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는 표현이 있다. 어느 곳으로 멀리 갔으며,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인가? 이 비유를 천리 만리 떨어진 타향으로 객관화시킬 필요는 없다. 바로 현실 속의 우리를 생각해보면 된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중생들은 고향을 등지고 살아왔다. 일심의 원천을 등지고 무명의 바람에 휩싸여 끝없이 흘러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계를 받아 몸과 말고 뜻을 거두어 잡음으로써 우리는 그 오랜 방황을 끝내고 일심의 원천으로 되돌아갈 수가 있다.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마음의 고향! 이것을 이 비유에서 ‘집에 돌아오다.’라고 한 것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 비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계율은 올바른 삶을 제시하고 마음의 풍요를 줄 뿐 아니라 참된 해탈의 세계, 참된 고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더 없이 소중한 스승이 된다. 그러므로 이 송계서에서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더 계실지라도 이와 다름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진정 계율을 부처님과 같이 받들고 지니고 존경하는 불자가 되어보라. 차츰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행복이 충만하여 마침내는 해탈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부디 삼귀의와 5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참 불자가 되기를 거듭거듭 축원해 본다.
日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