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3. 창조론, 우연론, 숙명론이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인연과 인과의 법칙을 벗어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반드시 어떤 원인에 의해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 뿐, 원인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밥을 먹다가 혀를 깨물게 되면 우연으로 돌려버리기 일쑤지만, 의학적으로 살펴보면 혀를 깨무는 것조차도 분명한 까닭이 있다고 한다. 우리 몸에 흐르고 있는 피가 오장육부를 순환하다가 어떤 이상을 일으키면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고, 불규칙한 맥박이 신경계통에 자극을 주면 이가 혀를 깨물게 되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바로 그 순간 맥박이 이상이 생기고 신경이 잘못되는 것인가? 이 모두가 인과의 맥락에서 보면 결코 우연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불교에서는 우주의 생성과 유지와 변화, 인생의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인과의 도리를 벗어난 우연론이나 전지전능한 창조주에 의한 창조론은 수용하지 않고 있다. 진정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면 인과의 원리에 따라 전개될 수가 없다.

그리고 전지전능한 신이 우주만유와 생명계를 창조하였다면, 우리가 암흑과 죄악, 약육강식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불행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만약 신이 잠깐의 실수로 세계를 잘못 창조하고 잘못 관리하여 이렇게 되었다면 그 전지전능한 힘으로 다시 개조하고 재창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역사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면 이 세계가 전지전능한 신의 창조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 우리의 현실이 신의 창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불교의 인과론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숙명론이나 운명론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운명론이나 숙명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 곧 사주팔자대로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의 자율적인 의지와 창조적인 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삶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은 불교의 인과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불교의 인과론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다. 나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나의 삶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 내가 받고 있는 이 결과는 어제의 행위가 원인이 되었고, 오늘 내가 짓는 행위는 내일의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인과론은 내일을 창조하고 오늘의 과오와 고뇌를 근원적으로 개조하기 위한 인과론이다. 곧 보다 적극적인 삶, 보다 멋진 삶의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 불교의 인과론인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인과응보와 윤회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물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라나고 있고 모든 것은 모르는 사이에 무르익어가고 있다.

삼세의 인연 또한 시간과 공간의 파장으로서, 전생에 하던 일과 생각했던 일을 금생에도 하게 되고, 금생에 하는 일과 생각하는 일은 내생으로 연장 확대되어 간다.

실제로 전생에 도를 많이 닦은 사람은 현세에서도 어려움 없이 도를 닦아 이루고, 전생에 예술을 깊이 익혀 영감을 기른 사람은 현생에서 특별히 예능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름난 예술가가 된 사례들이 허다하게 전해지고 있다.

인연따라 생겨나고 인연따라 사라지는 종연생 종연멸의 법칙! 이는 만고불변의 철칙인 것이다. 이제 인과응보와 윤회를 증명하는 실화 한 편을 음미해 보도록 하자.

日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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