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해탈(三界解脫) IV

열반진색(涅槃眞色)

이제 열반진색(涅槃眞色)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을 부처님 일대시교(一代時敎)라 곧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을 체계를 세워서 본다면, 유,공,중(有,空,中) 삼교(三敎)라고 합니다.

맨 처음에는, 우리 중생차원에서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너도 있고 나도 있다’ 그러한 정도의 낮은 법문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유교(有敎)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실은 있지가 않습니다. 선악(善惡)이나 자타(自他), 이런것은 우리 범부가 보아 있는 것이지, 원래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 자타가 없다, 원래 본질에서 보면 선악이 없다’ 이러한 자타와 선악을 초월한 법문이 공교(空敎)입니다.

그 다음에는 ‘다만 비어 있지 않고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님의 광명 뿐이다. 다만 부처님의 불성 뿐이다’ 이런 가르침이 중도교(中道敎)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문의 요지(要旨)는, 목적은 역시 중도(中道)에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중생차원에서 ‘있다 없다’ 하는 법문 곧, 인과(因果) 법문이나 그런 법문이 되겠지요. 그 다음은 ‘이런 것은 모두가 다 공(空)이다. 제법공(諸法空)이다’ 이러한 공(空)에서 보는 법문이고, 가장 높은 차원이 중도교(中道敎)로 본질에 바로 들어선 법문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다 부처뿐이다. 불성 뿐이다’ 하는 법문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불성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보이는 것인가?

우리가 말씀을 더 깊이 해야만이 이제 실감이 좀 나겠기에, 경전(經典) 가운데서는 불성광명(佛性光明)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을 살펴서, 우리한테 인식을 더 깊이 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열반(涅槃)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또는 생(生), 주(住), 괴(壞), 남(男), 여(女)의 십상(十相)이 없다’ 고 합니다.

열반은 우리가 닦아서 성불(成佛)한 단계가 열반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열반든다 하지만 그것은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다운 열반의 뜻은 ‘번뇌를 다 없애버린 단계 곧, 번뇌가 멸진(滅盡)한 단계’ 이것이 열반입니다. 즉 말하자면 성자의 단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성자의 단계는 십상(十相)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까, 선정(禪定)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선정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런 것은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그냥 맛도 못 보고, 또는 냄새도 못 맡고, 차근차근 올라가면 그때는 보아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의식(意識)만 남다가, 가장 맨 나중에는 의식마저 끊어지는 것 입니다. 의식이 끊어져 버려야 비로소 참다운 부처 곧, 대아(大我)가 되어서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열반도 역시 번뇌를 다 끊어버린 단계니까 마땅히 이런 상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상 곧, 물질이란 색(色)의 상소리, 향기, 맛, 촉감 또는 낳는다는 생기는 상, 머무르는 상, 부서지는 상, 또는 남자 상, 여자상, 이런 것이 없어져야 비로소 열반인 것입니다.

아까 말씀한 법문 가운데, 욕계(欲界)에만 남녀의 구분이 있고 색계(色界) 이상에는 남녀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열반 가운데도 남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욕계에 있는 중생이 보아서 남녀가 있는 것이지, 더 올라가서 참다운 불성(佛性) 자리에 올라가면 남녀나 색성향미촉 또는 낳는다, 부서진다, 이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하나의 영원한 불성(佛性)뿐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부처뿐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열반경(涅槃經)에 있는 법문으로, ‘색시무상(色是無常)이나, 색은 항상이 없으나, 인멸시색(因滅是色)하여, 이 색이 곧 우리가 보는 물질이 없어짐으로 말미암아서 그때는, 획득해탈상주색(獲得解脫常住色)이라, 항시 머무는 영생의 색, 해탈상주색을 얻는다’는 법문입니다.

이 법문은 일승법문(一乘法門)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법문이지만 이런 법문을 외워두시면 참 편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물질은 허망한 것인데, 허망하다는 관념이 익어져서 이걸 우리가 부정함에 따라서, 허망한 것이 없어짐에 따라서 참다운 해탈상주색(解脫常住色)인 항시 머무는 영생의 색을 우리가 얻는다는 말입니다.

나라는 색(色), 너라는 색(色), 그런 상(相)이 있을 때는 아직은 영원히 해탈색(解脫色)은 우리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자타(自他)의 색(色)이나 이런 것을 없앰으로 해서 비로소 영원한 해탈의 색(色)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일락서산월출동(日落西山月出東)이라’ 해가 떨어진 뒤에야 비로소 달이 솟아오른다는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번뇌가 안 떨어지면 영원의 해탈색은 우리한테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물질의 색(色), 이것은 비록 무상(無常)이나, 이것이 없음에 따라서, 이것을 부정함에 따라서, 비로소 영원적인 항시 머무는 해탈의 색을 우리가 얻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또, 그 다음 능엄경(능嚴經)에는 ‘여래장중(如來藏中)에, 부처님의 깨달은 경계 가운데는, 성색진공(性色眞空)이요, 불성(佛性) 가운데에 있는 색(色)은 바로 진공(眞空)이 되는 것이고, 성공진색(性空眞色)이라, 부처님의 불성(佛性)은 텅 비었지마는 또 역시 참다운 색(眞色)이 있다’고 합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복잡하니까 그냥 대강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청정본연 주변법계(淸淨本然 周遍法界)라,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광명(光明)이 법계(法界)에 충만해 있다’ 는 법문입니다.

우리 중생의 번뇌에서는 안 보이나, 참다운 안목으로 본다고 하면 청정한 광명이 법계에, 온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는 부처 님광명으로 충만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량광불(無量光佛)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무량광불인 것입니다. 이것은 능엄경(楞嚴經)에 있는 법문입니다.

그 다음 화엄경(華嚴經)에는 ‘일모공중(一毛孔中)에, 한 터럭 구멍 속에, 무량불찰(無量佛刹)이, 한량없는 부처님의 나라가, 장엄청정(莊嚴淸淨)하여, 장엄스럽게 청정해서, 광연안립(曠然安立)이라, 조금도 줄어지지 않고서 광활하게 편안히 있다’ 는 법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미묘법문(微妙法門)을 새기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본다고 할 때, 터럭 구멍이라는 것이 굉장히 작은 것인데, 이런 가운데에 부처님의 무량세계인 큰 세계가 조금도 안 줄어지고서 거기에 편안히 있다는 것입니다.

물방울 하나나, 태평양 물 전부나 물이란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물론 농도는 차이가 있을런가 모르지마는 물이란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불성(佛性)에 한번 들어가면은, 천지를 다 통합한 불성이나 또는 불성의 한쪽이나 그때는 똑같은 것입니다. 그 성질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이 원융무애(圓融無碍)라는 말입니다.

석가모니한테 있는 불성이나 나한테 있는 불성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개미한테 있는 불성 또는 사람한테 있는 불성이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불성에 한번 들어가면은 우주는 모두가 다 불성뿐인 것입니다. 불성위에서 우주가 그때그때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비록 한 터럭의 조그마한 구멍 속이라 하더라도, 의미로 보아서는 천지가 거기에 다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다 공부해서 차근차근 스스로 납득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 터럭 구멍 가운데, 무량의 부처님 세계가, 장엄청정(莊嚴淸淨)해서 조금도 크기가 줄어지지 않고 있다는 말은 이치가 아닌 말 같으나 이것이 원융무애(圓融無碍)입니다.

또 ‘찰찰진진(刹刹塵塵)이, 어떤 물질이나 모든 것이, 구설구청(俱說俱聽)하여, 함께 설법하고 함께 들어서, 설청동시(說聽同時)하니, 설법과 듣는 것을 같이 동시에 하니, 묘재(妙哉)라 차경(此境)이여, 묘하구나 이런 경계여!’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설법을 저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저한테 지금 설법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무언 중에 말입니다. 나무나 소나 또는 공기나 모두가 다 설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어두워서, 중생의 귀가 한정되어서 미처 못 듣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모든 제법(諸法)이 다, 방식만 차이가 있지 서로 피차 설법하고 서로 피차 듣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서로 피차 설법과 듣는 것을 동시에 하는 것이니 이런 경계가 참 묘하구나! 이런 경계는 깨달은 뒤에만 비로소 알수가 있는 것이니까 이제 묘하다고 했겠지요.

그 다음 또 ‘묘색담연상안주(妙色湛然常安住)요’ 묘색(妙色)이란 일반색이 아니라 청정미묘한 불성의 색을 말한 것입니다. 청정 미묘한 불성의 색이 고요히 우주에 가득차게 안주(安住)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이생로병사천(不移生老病死遷)이라’ 우리가 죽고 살고 늙고 병들고 한다 하더라도 이런 묘색(妙色)은 조금도 옮기지 않고 변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런 것은 일승(一乘) 경전에 있는 법문이니까, 앞으로 수십번 외우시고 생각하면 차근차근 열반의 참다운 색인 열반진색(涅槃眞色)을 더 깊이 인식하고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혜해탈(慧解脫)을 얻으시고 가행(加行) 정진으로 사선정(四禪定)에 들고, 나아가 멸진정(滅盡定)을 통과하여 삼계(三界)를 초탈(超脫)하고, 선정해탈(禪定解脫)로 기필코 성불(成佛)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

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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