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세월이 흘렀는데도 반가운 얼굴들이 건재해 보이시니 대단히 반갑습니다.
저하고 같은 연갑인 노보살님도 빠짐없이 동참하게 되어서, 나도 죽지 않았는데 그 분도 안 돌아가시고 계셔서 더욱 더 반갑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법왕법(法王法)입니다. 법왕법이란 바로 진리의 왕이 법왕입니다. 따라서 세계 여러 가지 종교가 자기 나름대로 진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만 모든 진리가 다 법왕법에 귀속이 됩니다. 그 법들이 그냥 상대 유한적인 법이 아닐라 이른바 절대적인 모든 것을 그 곳에 포괄하는 그런 법입니다. 요즘 실존주의 철학이라 하는 철학이 있지 않습니까. 그 실존철학자 가운데서 야스퍼스(je-spers)라고 하는 위대한 독일 철학자가 있습니다. 현대 철학 가운데서 우주의 실상 즉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을 탐구하는 철학이 실존철학인데 그 스승 가운데 한 분이 야스퍼스라는 분인데 그 분이 말씀한 요지가 무엇인가 하면 그 포괄자(包括者)입니다.
모두들 다 그 곳에 담아있는 것이 바로 포괄자입니다. 모든 것을 포함시켜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은 그 보다 더 본질적이고 어떤 철학체계나 어떤 성자(聖者)의 종교나 철학적 교설(敎說)도 다 담고 있고 포괄하고 있습니다. 포괄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초월해 있는 법중의 법입니다. 그래서 법왕법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 곧 법왕법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른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법이란 말입니다. 무시무종이라.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법이니까 말을 더 전개시키면 남(生)도 없고 죽음(死)도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 몸뚱이도 분명히 한계가 있고 세계도 한계가 있는 것인데 어째서 그런 법이 한계가 없고 시간적으로 보나 공간적으로 보나 그야말로 무가정(無可定)의 원리일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사실로 봐서는 중생이 대상을 분할해서 보고 나누어서 보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중생이 무명심으로 중생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지 무명심을 떠나버리면 모두가 하나요, 하나의 진리가 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괴로움을 느끼고 인생고를 느끼며 시달리는 것은 중생이 진리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괴로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째서 없는가 하면 괴로워하는 자기 주체도 본래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괴로워하는 자기 주체도 하나의 환상인 것이지, 실존적(實存的)인 실재적(實在的)인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다른 일체만유도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우리 선방 스님네들이 아주 그야말로 자랑스럽게 영광스럽게 한철 공부하시고 해제(解制)한 날이고 재가 불자임 출가 불자님 모두가 정말로 여법(如法)히 공부하시다가 해제라. 일단 결제를 푸는 날입니다. 그러나 깊은 의미를 생각할 때는 사실은 우리 중생들이 결제하고 결제를 풀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가 바로 진리 아님이 없는 것이며 우리 중생도 하나의 진리의 주인공의 한사람이며, 우리가 아직 진리를 온전히 체험 못했을 때는 진리를 체험하여 진리와 하나가 되는 그 자리가 해제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와 하나가 못되었을 때도 해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비단 금생 뿐만 아니라 몇 생을 더 윤회한다하더라도 모든 진리와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서 진리를 체험하는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해제란 말입니다. 그러나 사바세계는 모양의 세계이기 때문에 모양의 세계는 끝도 있고 시작도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해제가 되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실지 의미에서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성불 때까지는, 부처가 될 때까지는 사뭇 공부를 해야한단 말입니다.
그 무명이란 것이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무명인데 무명이란 것이 그야말로 집요한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이 무명인데, 인생고는 다름 아닌 무명 때문에 잘못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불경에는 제고가 무명고(諸苦無明故)라. 인생고가 무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생고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무명 때문에 잘못 보아서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무명의 반대가, 무명의 반대인 동시에 무명의 본체(本體)가, 진여(眞如)란 말입니다.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무명과 진리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영가현각대사(永嘉玄覺大師)의 증도가(證道歌)에도 있는 법문입니다마는 무명의 실상이 바로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無明實性卽佛性). 무명이 따로 있고 즉 어리석음이라는 무명이 따로 있고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결국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란 말입니다. 진여 뿐인데 우리 중생이 자업자득으로 스스로 분별시비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명도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진여 위에 이루어진 하나의 허상에 불과합니다. 허구(虛構)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성불할 때까지는 사뭇 놓치지 않고서 공부를 해야되겠지만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중생은 모양세계에 있어놔서 모양세계란 것은 그때그때 구분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하루에 세 때 먹어야되고 갈 곳은 가야되듯이, 모양에 따른 한계가 있어서 쉴 때도 필요하고 푸는 제도 맺는 제도도 있고 처음과 끝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공부에는 무간수행(無間修行)이라. 없을 무(無)자 사이 간(間)자, 사이가 없이 공부를 해야 번뇌(煩惱)의 침해를 받지 않습니다.
공부를 했다 안 했다 하면 우리 중생의 본래의 뿌리는 진리일망정 우리가 무명무지가운데 있고 과거 전생의 숙업(宿業)도 많이 짓고 금생에도 학교에서 잘못배우고 사회의 모순상황에서 오염(汚染)을 많이 받습니다. 그 때문에 중생은 범부(凡夫)때는 하나의 속물(俗物)입니다. 속물이란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 속물입니다. 산이나 냇이나 좋은 것이나 궂은 것이나 모두가 다 바로 본다면 이것이 환상에 불과한 것인데, 제법(諸法)이 다 공(空)한 것인데, 제법이 공한 것인 줄 모르는 것은 사실은 중생이 속물이란 말입니다.
淸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