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상을 관념론(觀念論)과 유물론(唯物論)으로 구분하지 않습니까.
관념론은 천지우주가 모두가 관념론인 것이고, 유물론이란 것은 그렇지 않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산이요 냇이요 달이요 해요 내 몸뚱이 등 모두가 물질뿐이지 않은가. 궁극적인 것은 물질뿐이지 않는가, 이것이 이른바 유물론이란 말입니다.
헌데 그 모두가 물질뿐이라는 생각에서 이런 생각 밑에서 공산주의가 나오고 맑스주의가 나오고 했던 것입니다. 또는 그 유물론 체계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이 나온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가 바르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으로 생각할 때 오온화합(五蘊和合), 오온(五蘊)이 가화합(假和合)한 것이 내 몸이요, 내 정신이란 말입니다. 즉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인 물질적 요소와 수상행식(受想行識)인 정신적 요소, 그것이 오온 아닙니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개공하는 오온이라 말입니다. 우리 몸이나 모두가 물질적인 것으로 구성되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에게 보이는 것은 오온 차원 밖에 안 보입니다. 따라서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오온세계란 말입니다. 오온 세계는 실상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오온이 사실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중생은 항상 범부 속물 인 것이고 속물주의의 속물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속물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참 저놈은 속물이구나, 속기(俗氣)를 떠나지 못했다’ 하는 말처럼 물질에 얽매이지 않아야 참 무위(無爲)의 세계, 안락스러운 세계, 훤히 트인 마음을 가질 것인데 우리 눈에 보이는 곧이곧대로 그대로 있다, 한다면 속물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부는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 즉 오온개공자리, 오온이 다 비어있는 그 자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할 때 분명히 눈으로 봤을 때 있는 것인데, 있는 그대로 다 비었다고 하니까 성기신 일이 아닙니까. 그것도 과학적으로 분석해본 다음에 빈 것이라 뜻이 아니라 오온즉공(五蘊卽空)이라. 바로 이대로 오온이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아니 내 몸뚱이가 이렇게 꼬집어 뜯으면 아픈데 이대로 비었다 하면 곧이 듣겠습니까. 사실은 이대로 빈 것입니다.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여러분들의 반가운 얼굴들도 모두가 다 바로 빈 것이란 말입니다. 당체즉공이란 말은 지금 보이는 이 몸 이것이 그대로 비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가 지은 업보(業報) 때문에 사실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금까지 내려온 업보가 그렇게 무겁기 때문에 그런 업보를 녹이는 것이 공부란 말입니다. 그래서 또 공부하는 것도 공부를 끊침이 없이 해야지 했다 말았다 하면 업보가 지중해서 업이 되어집니다. 화두를 참구하고 염불을 한다하더라도 과거전생에 지은 업에다가 금생에 배운 것도 대체로 있다 없다하는 그런 상대적인 소식이란 말입니다. 있다 없다 유무(有無)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차원에서만 있고 없는 것이지 영원(永遠)적인 차원에서는 유무가 없습니다. 자타시비(自他是非가 모두 다 허망한 법입니다. 오온이 개공(皆空)인데 즉 물질이나 관념을 구성하는 것이 오온인데 그런 오온이 비었다고 하면 우리로서는 허무한 일이 아닙니까.
부처님 법을 깊이 단계적으로 생각하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은 중생이 즉 속물이 보는 있다 없다 하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차원 높은 것은 오온개공, 모두가 다 본래로 비어있다 하는 차원입니다. 분석해서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당체즉공이라. 있는 그대로 바로 비어있다는 말씀입니다. 금강경(金剛經)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도리는 다 당체즉공이라. 그 존재자체가 비어 있다는 그런 소식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체즉공의 공(空)이란 것은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면 허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이론의 토대 위에서 공부해 가지고, 즉 기도도 많이 모시고 참선도 오랫동안 해서 이른바 삼매(三昧)에 들어가면 그때는 그 공(空)의 알맹이를 우리가 체험하게 됩니다.
淸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