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양기의 등잔(燈盞)은 천추(千秋)를 밝히고… 1

혜원(慧圓) 거사 보게.

보내온 편지는 잘 받았네. 어제 명도(明道) 법사가 나가는 길에 그대에게 160원(元)을 송금하여 자네 일을 끝마치도록 부탁했네. 그대는 비록 나를 안 지 몇 년이나 되었으면서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네. 그래서 내가 부득이 그대에게 나를 간략히 말하여야겠네.

나는 두 가지를 끊어 버린[二絶] 고뇌에 찬 자식일세. 그 두 가지란 집안에서는 후사(後嗣:자손)를 끊어 버렸고, 출가해서는 불법의 후사도 끊어 버린 불효를 말하네(출가 제자를 평생 하나도 받지 않았음).

또 고뇌를 말하는 것은, 내가 본디 태어난 곳은 글 공부하는 유생들이 평생 부처님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하고 단지 한유·구양수·정자·주자 같은 유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한 학설만 알았는데, 멋모르고 사람들은 이를 지상 최고의 신조로 받들었네.

그런데 나는 그들보다 백 배 이상 미친 듯이 날뛰었지. 다행히 십 년 남짓 지나는 동안 지겹게도 많은 병치레를 겪으면서, 나중에야 바야흐로 이들 옛날 유학자들이 주장한 학설이 본받을 만한 것이 전혀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나는 한 번도 선생님에게서 배운 적이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형님이 가르쳐 주셨네).

처음 몇 년간은 형님이 장안(長安)에 계셔서 쉽게 기회를 얻을 수 없었는데, 광서(光緖) 7년(1881:21세) 형님이 집에 가 계시고 나 혼자 장안에 있는 틈을 타서(집은 장안에서 420리 떨어진 곳에 있었음) 마침내 남쪽 오대산(五臺山)에 출가하였네.

스승은 내가 분명히 모아둔 재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출가야 받아주지만, 의복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나에게 단지 장삼 한 벌과 신 한 켤레만 주셨네. 그러나 방에 머물며 밥 먹는 것은 돈을 내지 않아도 되었네(그곳은 매우 춥고 힘든 곳인데, 밥 짓는 일 따위는 모두 손수 하여야 했지).

그 뒤 석 달이 채 못 되어 형님이 찾아 왔는데, 꼭 집에 돌아가 먼저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올린 다음에 다시 와서 수행하면 괜찮다고 말씀하셨네. 나는 그 말이 속임수인 줄 알면서도 대의명분상 일단 되돌아 가지 않을 수 없었지. 가는 길에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는데, 어머님께서는 뜻밖에도 출가를 특별히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으셨네.

이튿날 형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 “누가 너에게 출가하라고 시켰냐? 너 혼자 스스로 출가한 거냐? 오늘부터는 출가할 생각일랑 아예 내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아주 혼내줄 거다.”

나는 단지 그를 속이는 수밖에 없었네. 그렇게 집에서 80여 일을 머무는 동안 도무지 기회를 얻지 못했네. 하루는 큰형님은 친척을 만나러 가고 둘째 형님은 밖에서 곡식을 말리는데 닭이 쪼아 먹지 못하도록 지켜야 하게 되었네. 이제 기회가 온 줄 알고 학당(學堂)에 가서 관음(觀音) 점괘를 하나 뽑아 보았는데, 그 내용도 딱 맞아 떨어졌지.

“고명(高明)한 분이 복록(福祿)의 자리에 있으니, 새장에 갇힌 새가 달아날 수 있다. 마침내 스님의 장삼을 훔쳐 돈 2백 전과 함께 가지고 갈 것이다.”(그 전에 형님은 나의 장삼을 바꾸려고 했는데, 내가 만약 스님이 사람을 보내 찾으러 오면 원물로 반환해야 탈이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소송을 제기해 적지 않은 골치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해서 장삼을 그대로 보관할 수 있었네.)

그렇게 도망쳐서 다시 스승 계신 곳에 도착했으나, 형님이 다시 찾아올까 두려워 그곳에 감히 머물지 못하고 하룻밤 묵은 뒤 떠나야 했네. 그때 스승께서 여비로 1원짜리 양전(洋錢)을 주셨는데, 당시 섬서(陝西) 사람들은 아직 그 돈을 본 적이 없어 상점에서도 받지 않았네. 그래서 은(銀)과 바꾼 뒤 8백 문(文)에 팔았는데, 이것이 내가 스승에게 받은 것일세.

호북(湖北) 연화사(蓮花寺)에 들어가 가장 힘든 일감을 달라고 했네(밤낮 끊임없이 석탄을 때서 40여 명이 먹고 쓸 물을 끓이는 일이었는데, 물도 스스로 길어 와야 하고 탄재도 직접 퍼내야 했네. 아직 계를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절에 묵을 수 있게 해 준 것만도 이미 커다란 자비였네).
이듬해 4월 부사(副寺:절의 부책임자) 스님이 돌아가고 고두(庫頭:창고 담당, 재무) 스님이 병 나자, 주지스님은 내가 성실한 것을 보시고 창고(재무)를 돌보도록 분부하셨네. 은전(銀錢)의 회계는 주지스님이 직접 하셨지.

나는 처음 출가했을 때 “양기의 등잔은 천추를 밝히고, 보수의 생강은 만고에 맵도다”[楊 燈盞明千古, 寶壽生薑辣萬年]는 대구를 보았네.

또 사미계율(沙彌戒律)에 상주(常住:절간) 재물을 훔쳐 쓰는 과보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몹시 두렵고 조심스러웠네. 그래서 단 음식 하나 정리하면서도 손에 가루나 맛이 묻으면 감히 혀로 핥아 먹지 않고 그냥 종이로 닦아낼 뿐이었네.

양기 등잔이란 양기 방회(方會) 선사가 석상(石霜) 원(圓) 선사 아래에서 감원(監院:지금 우리 나라 절의 원주 스님)을 할 때, 밤에 경전을 보는데 스스로 기름을 사서 쓰고 상주 기름을 몰래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네.

보수 생강이란, 동산(洞山) 자보(自寶) 선사(寶壽는 그의 별호)가 오조(五祖) 사계(師戒) 선사 아래에서 감원을 할 때, 스승이 차가운 병(寒病)이 있어 생강과 노란 설탕을 끓여 고약(膏藥)으로 늘 먹곤 했는데, 스승을 시중드는 스님이 와서 이 두 물건을 달라고 하자, 그는 “상주의 공유물을 어찌 개인용도로 쓸 수 있소? 돈 가지고 가서 사다가 쓰시오.”라고 답하며 거절했다는 거네.

이에 사계 선사는 곧장 돈을 가지고 사오라고 시키면서, 그 제자를 몹시 기특하게 여겼네. 나중에 동산(桐山)의 주지가 사람이 필요해 사계 선사에게 아는 사람이 있으면 추천하라고 부탁하자, 사계 선사가 생강을 사도록 한 사나이면 될 거라고 답했다는 거네.

『선림보훈(禪林寶訓)』 중권에는 설봉(雪峯) 동산(東山)의 혜공(慧空) 선사가 서울에 과거 보러 가는데 필요한 마부를 빌려달라고 요청한 여재무(余才茂)에게 답장한 편지가 실려 있네. 대강의 내용은 이러하네.

“내가 비록 주지이긴 하지만 역시 한낱 빈궁한 선승에 불과하오. 이 마부는 상주에서 나온 것이고 공(空)에서 나온 것이오. 상주에서 나온 것이니 곧 상주를 훔치는 게 되고, 공에서 나온 것이니 텅 비어 하나도 없는 것이 되오. 하물며 귀하가 서울에 가서 부귀공명을 얻으려고 함에는, 필요한 물건을 삼보(三寶)에서 구하여 주는 이나 받는 이 모두 죄를 짓는 일은 없어야 될 줄 아오. 설사 다른 절에서 준다고 할지라도 사절하고 받지 않는 것이 바로 앞날의 복이 될 것이오.”

근래 속된 스님들은 금전과 재물을 교유(交遊)관계나 제자 또는 세속의 집안에 쓰는 일이 너무나 많네. 나는 한평생 교유를 맺지 않고 제자를 받지 않으며 주지를 하지 않기로 서원하였네. 광서 19년(1893년:33세) 보타산(普陀山)에 이르러 밥 먹는 한가한 중이 된 이래 30년 남짓 어떤 직책도 가져본 적이 없네. ‘인광(印光)’이라는 두 글자는 남을 위해 대신 수고하는 종이 위에 절대로 쓰지 않았네. 그래서 20여 년간 편안히 지낼 수가 있었지.

나중에 고학년(高鶴年)이 몇 편의 원고 조각을 속여 가지고 가서 「불학총보(佛學叢報)」에 실었을 때도 아직 ‘인광’이라는 이름은 쓰지 않았네. 민국3년(1914:54세) 이후에 서울여(徐蔚如)와 주맹유(周孟由)가 자기들이 나의 글을 수집하여 북경에서 『인광문초(印光文抄)』를 인쇄하겠다고 졸라 민국7년(1918:58세) 책이 나왔네.

그 후로 날마다 편지를 받고 오로지 남들을 위해 바쁘게 살아왔네. 그러다가 남의 말을 잘못 전해 듣고 나에게 귀의하겠다고 원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에, 단지 그들의 믿음에 내맡겨 두었을 따름이네. 부자에게도 나는 공덕을 쌓으라고 보시를 청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나는 특별히 구휼이나 자선을 베풀 수가 없었네.

광서 12년(1886:26세) 북경에 들어간 적이 있으나, 우리 스승에게서 역시 한 푼 받은 것도 없네. 그 뒤로는 도업(道業)에 진척이 없어 감히 서신 한 통 올리지 못하다가, 17년(1891:31세) 스승께서 입적하신 후에는 여러 사형제(師兄弟)들이 각자 제 갈 길로 흩어졌지. 그리하여 40년 동안 출가 동문과도 편지 한 구절이나 한 푼어치 물건을 서로 주고 받은 적이 없다네.

우리 집안은 광서 18년 한 고향 사람이 북경으로부터 귀향하는 길에 편지 한 통 부친 적이 있네. 그때는 아직 우체국도 없고 큰 길도 없어서 그가 직접 전달해 주지 않으면 편지를 부칠 방법이 없었지(지금은 비록 우체국이 있지만 배달해 줄 사람이 없으면 역시 부칠 수 없네). 이듬해 남쪽으로 내려와 소식이 완전히 끊겼네.

민국 13년(1924:64세)에 이르러 한 생질이 사람들 말을 듣고 산으로 나를 찾아왔네. 그때서야 비로소 후사가 이미 끊겨 집안의 다른 손자가 양자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네(이 일은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네. 나중에 조상의 덕을 손상시킬 자가 없으니 말일세. 양자가 대를 이었지만, 이는 우리 부모의 친자손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에게도 편지를 보내지 않았네.

민국 이래로 섬서 지방의 재난이 가장 심한데, 만약 그에게 편지를 했다가 그가 남쪽으로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를 편안히 정착시킬 땅도 없고 그가 되돌아 간다고 해도 수십원은 필요할 테니, 그의 왕래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손해만 될 걸세. 그래서 지난 해에 합양(合陽)의 재난을 구휼할 때도 단지 현(懸) 당국에 송금하였으며 감히 우리 마을 이름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네(우리 마을은 현 소재지에서 40여 리 떨어져 있네). 만약 언급했다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할 줄 모르네.

올봄 진달(眞達) 법사가 최근 이삼년 동안 섬서 재해만 구휼해온 주자교(朱子橋)를 통해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서너 거사와 함께 1천원을 모아 자교에게 주면서 특별히 우리 고향 동네에 나눠주라고 부탁했다네. 그러나 수백 가구에 천원이 별로 큰 도움은 되지 못했을 것일세. 그리고 이 일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오겠다는 사람이 생겼네.

우리 집안의 생질인 한 상인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아무개가 남쪽으로 찾아와 나를 방문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겠느냐고 물어왔네. 그래서 내가 답신하기를 만약 그대가 보살필 수 있으면 그에게 좋은 일을 마련해 주는 것이 가장 좋고, 그렇지 않으면 왕래가 몹시 힘들고 본인에게 손해만 될 뿐 별 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간곡히 말해주어 그들을 지쳐 죽게 하는 일이 없도록 잘 회답하라고 부탁했네. 이 일은 진달 법사가 한바탕 호의를 베풀면서 그 영향까지는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한 때문일세. 또 나에게는 말 한마디 안하여 내가 알았을 때는 일이 다 이루어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네.

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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