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세간(世間 : 儒家나 道家)의 성인 말씀은 너무 간략하고 또 현세와 자손밖에 언급하지 않고 있네.
태어나기 이전(전생)이나 죽은 이후(내생)에 시작도 없이(無始) 죄와 복의 인연에 따라 육도 윤회를 반복하고 있는 인과응보는 밝히지 않는 걸세. 그래서 식견이 천박한 자는 비록 매일 같이 성인의 인과응보 말씀을 읽을지라도 여전히 인과응보의 원리를 믿지 못하고 있네.
[옮긴이 보충 해설 : 예컨대 유가의 삼세윤회관을 대표하는 일화는 이러한 것이다. 한 제자가 사람이 죽은 뒤 영혼세계가 존재하는지 묻자, 공자는 중생들에 대한 교화목적이라는 실용성을 이유로 가부간의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영혼이 있다고 하면 죽은 이의 효성스러운 자손들이 차마 시신을 갖다 매장하지 못하여 상례(喪禮)나 살아 남은 후손들의 현실 생활에 지나치게 커다란 장애를 몰고 올 것이며, 그렇다고 영혼(사후세계)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러지 않아도 각박한 인심이 더욱 불효막심을 패역무도해져 세상이 극도로 혼란해질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때가 되고 인연이 닿으면 각자 느끼고 알게 될 것이라며, 자칫 무익하고 공허한 관념 논쟁에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하는 현세실용의 교화방편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가에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극진한 공경과 정성으로 받들어 중시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받는 분이 살아 계신 것처럼 하라(祭如在, 祭神如神在)”고 강조한 공자의 말 등을 찬찬히 음미해 보면 내생과 윤회에 대한 확신을 읽을 수 있다.]
여래의 큰 가르침은 우리 인간 심성의 오묘함과 삼세 인과응보의 미묘함을 뚜렸이 내보일 뿐만 아니라,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편천하의 도에서부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중득하여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법문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바가 없다네.
그래서 부모에게는 자애를 말하고 자녀에게는 효성을 일깨우며 형제에게는 우애를 일러주고 부부에게는 화목과 순종을 말해주며 주인은 어질고 하인은 충성하여 각자 자기의 맡은 바 직분을 다하도록 가르치시니 이는 세간의 성인 말씀과 전혀 다를 바가 없네.
그러면서도 사실 하나하나에 대해서 다시 앞의 원인과 뒤의 결과를 밝혀주시는 점은 세간의 성인이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지, 의리를 다하고 직분을 다하라는 식의 말은 단지 최상 근기의 지혜로운 자에게나 통할 뿐, 하근기의 어리석은 자에게는 먹히지 않네.
그러나 인과응보를 알면 선악과 화복이 불을 보듯 뻔하게 되니, 누가 흉함을 피하고 결함으로 나아가며 화를 면하고 복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겠는가? `인과(因果)’ 두 글자는 세간과 츨세간의 일체법을 두루 총망라하여 빠뜨림이 없네. 세간[儒敎]의 성인도 인과를 분명히 보여주지 않음이 없으나, 다만 세상을 경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후세에 계속 전진해질 수 있는 가르침을 펼친 것 뿐이라네. 그래서 오직 현세[今生]와 선후대(先後代) 부자 조손 간의 인과응보에 국한하고, 태어나기 이전[前生]과 죽은 이후[來生]는 물론, 시작도 없는 아득한 과거와 끝도 없는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을 걸세.
그런데 후대의 학자들은 성인의 본래 뜻을 제대로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나 만물이 생겨나는 것은 단지 천지간의 기운(氣:에너지)이 우연히 결합하고 변화하여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일 따름이라고 터무니없이 쉽게 말하는 구려. 또 죽음에 이르면 만물의 형체가 썩어 문드러지면서 영혼도 또한 바람에 나부끼듯 흩어져 없어지기 때문에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고 하는 군.
이러한 단멸상(斷滅相)에 빠진 사견(邪見)이 성인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자신의 영혼까지 어리석게 타락시키는 해악은 매우 심하다네.
공자가 주역(周易)의 위대하고 오묘함을 찬탄하여 그 의리(義理)를 부연 해석하면서 맨 처음 꺼낸 말이, “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 넘치고, 악을 쌓는 지반에는 반드시 재앙이 넘친다”는 거라네.
또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의 간청에 따라 아홉 가지 홍범(洪範:書經의 한 편명으로 `큰 법도’라는 뜻)을 진술하면서 맨 끝에 바야흐로 오복(五福:장수·부귀·안녕·好德·善終)과 육극[六極:비명횡사(요절)·질병·우환·빈곤·포악·허약]을 함께 분명히 밝혀 선악과 화복의 위엄으로 매듭지었다네.
이 두 성인이 밝힌 경전의 내용이 만약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통틀어서 함께 논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늘이 내려준 법도나 성인이 펼친 언론(철학)이나 현명한 군왕이 시행한 정치명령은 모두 모순투성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걸세(예컨대 간사한 악당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정의로운 충신들이 처형되며, 안회가 요절하고 도척이 장수한 사실들이 모두 그렇지).
그러나 전후 인과응보의 원리를 알게 되면 곤궁하고 통달하거나 잃고 얻음이 모두 한결같이 자기 스스로 구하고 받는 것임을 깨달아, 설령 몹시 어려운 시련과 역경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지 않을 수 있네. 단지 자기의 덕이 아직 충분히 쌓이지 못해 과보가 무르익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 할 뿐, 하늘이나 사람들의 각박한 대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게지.
이렇듯이 하늘의 섭리(造化)를 즐거이 따르며, 자신의 운명(분수)을 알고 만족한다면 언제 어디엘 가든지 자유자재로의 소요유(逍遙遊)할 수 있다네. 불법을 유통시키는 이익과 공덕은 한량이 없네. 선천의 근기가 두터운 자는 심오한 이치를 체득하여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보며(明心見性) 나아가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道)를 중득할(斷惑證眞) 수 있겠지.
또 선천의 근기가 다소 얕은 자라도 평이한 내용만 이해하면 죄악을 고치고 선행을 닦아 성현이 되길 희망하는 발원으로 정진할 수 있지 않겠나? 진실로 여래께서 교화를 베푸신 까닭은 비록 출세간을 위하셨다고 하나 각자의 근기와 시절인연에 따라 중생을 순순히 잘 유도하심에 있었네.
그래서 세간을 경륜하는 도에 있어서도 또한 조그마한 선(善라)이라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완전히 발휘하셨지. 부모에게는 자애를, 자손에게는 효성을, 형제에게는 우애를, 부부에게는 화목을 각각 말씀하셨네. 일상생활의 모든 윤리도덕이 유교의 가르침과 전혀 다름이 없다네.
다른 점이 있다면 삼세(三世)의 인과법칙과 선악의 과보를 일일이 보이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에 공경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감히 분수와 법도를 벗어나지 않으며, 비록 외진 구석과 깜깜한 방안에 혼자 있더라도 늘 하늘과 부처님 앞에 나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처신하도록 가르친 게지.
설사 탐욕과 잔인·포학으로 가득찬 최하근기의 악인이라도 비록 처음에는 전혀 신심히 없겠지만 인과응보의 사리를 오래도록 계속 듣다보면 그 마음에 원인을 두려워하고 결과를 무서워하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연중에 저절로 조복(調伏)되고 그렇게 전처럼 아주 심하지는 않게 될 걸세.
예컨대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각국에서 산 사람을 죽여 제사지내거나 사랑하던 첩과 신하를 순장(殉葬)하는 풍속이 치성하여 걸핏하면 수십 또는 수백 명을 태연스럽게 생매장을 하고 그 수가 많을수록 부귀와 영화를 상징한다고 여겼네.
물론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어진 은택은 땅 위에 나뒹구는 마른 해골에까지 미쳤다지만 그 뒤로 몇 백년이 채 못 되어 살인순장의 악풍이 천하에 두루 퍼진 걸세. 비록 노자·장자나 공자·맹자 같은 성현이 연달아 세상에 나왔지만 그러한 퇴폐악습을 그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
그러다가 불법이 중국에 전래된 뒤로 생사윤회와 인과응보의 원리가 세상에 크게 밝혀지면서 지방의 제후는 물론 `짐(朕)’이라고 일컬으며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조차도 감히 더 이상 순장을 계속할 엄두는 못 내었네. 설령 어쩌다 순장하는 자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수가 많을수록 영광으로 여기는 일은 결단코 없었네.
그러나 가령 생사윤회나 인과응보의 법칙이 없이 단지 정심(正心)·성의(誠意)의 학설만 가지고 충서(忠恕)의 덕목에 따라 자기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려 순장을 그만두고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라고 가르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렇게 권장하고 가르친 사람은 헛수고만 하고 순장의 악습은 더욱 치성했을 것 같네.
하물며 후대의 유학자들은 단지 바깥 세상 다스리는 도[治道]에만 급급하고 자기 마음 다스리는 수양은 외면한 채, 불법을 비방하고 배척하면서 자기 학파를 세우고 이어 나가려고만 했으니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한결같이 말하기를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영원히 사라지고 후세나 영혼 같은 것은 없다고들 주장했으니….
만약 여래의 생사윤회와 인과응보의 가르침이 사람 마음에 흠뻑 적셔지지 않았다면 후세의 중생들은 타고난 수명대로 살다가 평안히 죽는[善終] 사람조차 드물었을지 모를 일이네. 이것이 불법 가운데 가장 평범하고 기본 되는 법문이지만 오히려 잔인하고 포악한 살인의 풍속을 가라앉히는 특효약이 되었지.
하물며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며 원만한 돈오의 대법문[圓頓大法]을 세 속의 지혜와 범부의 감정으로 어떻게 짐작하며, 또 그 이익을 만분의 일이라도 감히 헤아릴 수 있으리? 이러한 까닭에 부처는 시방삼계의 위대한 스승이고 모든 중생의 자애로운 아버지이며, 성인 가운데 성인이며, 하늘 가운데 하늘임을 알 수 있네.
격물(格物), 치지(致知)부터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또 밝은 덕을 밝혀(明明德) 지극히 선한 경지에 다다르는 세간(유교)의 대학지도(大學之道)도 부처님의 법문을 회통(會通)하면 더욱 쉽게 절반의 힘으로 배 이상의 효험을 얻을 수 있다네.
그래서 역대로 훌륭한 군왕과 현명한 신하나 통달한 선비와 뜻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계속하여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정진하면서 불법을 보호하고 유통시키는 데 적극 앞장 서 온 것이라네. 일체 모든 법이 마음을 근본으로 삼지만 오직 불법만이 궁극의 이치까지 철저히 밝혀 가르치기 때문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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