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논(論)함 1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은 불교에 입문하는 첫 걸음이자, 유교의 대학(大學)에서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誠意] 마음을 바로 하며[正心] 자신을 닦고[修身] 집안을 거느리며[齊家]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천하를 평정하는[平天下]중요한 바탕이기도 하네. 그러므로 인과법칙은 세간이나 출세간의 성인 모두가 천하를 다스리고 중생을 제도하는 중대한 권능일세.

지금 세상에서 만약 인과응보를 나라 구하고 백성 구제하는 급선무로 삼지 않는다면, 설령 그대의 지혜와 재주와 도덕이 제아무리 높고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모두 헛것에 지나지 않게 되네. 도리(道理)를 말하지 않으면 왕법(王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

옛날 성현들은 어느 누구도 전전긍긍하며 자기를 꽉 붙잡아 지니지〔操持〕않은 사람이 없었네. 그래서 그 마음이 빈공궁핍이나 부귀영달에 따라 오락가락 흔들리지 않았지. 맹자(孟子)가 말한 대로, 곤궁하면 홀로 자신을 착하게 닦고, 영달하면 천하 중생을 두루 바르게 교화한 걸세[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일상생활과 언행에서 부자·형제간이나 부부 사이조차도 하나하나 법대로 하지 못하는군. 조그만 지식이나 식견이 있어도 곧바로 특출한 위인이나 되는 것처럼 함부로 떠들어 대네. 권세를 얻지 못했을 때는 망령되고 맹목적인 주장을 횡설수설하여 세상을 현혹시키고 중생을 속이는가 하면, 일단 자리를 차지한 경우에는 포악하고 못된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어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해치기 일쑤이지.

이러한 병폐의 뿌리는 모두 그의 부모나 선생들이 맨처음 가르칠 때부터 일찍이 인과응보의 도리를 제대로 일깨워주지 않은 데서 비롯되네. 가령 조금만 인과응보의 법칙을 안다고 해도,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일으킬 때마다 저절로 조심과 두려움이 들어 감히 제멋대로 방종하지는 못할 걸세. 그러면 설사 성현이 되려고 바라지 않는다 할지라도, 깊은 연못에 임하고 얇은 살얼음을 밟듯이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러기에 천부자질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더더욱 가깝고 얕은 곳으로부터 손대야 하네. 선이 조그맣다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 말며, 더구나 악이 조그맣다고 무심코 저질러서는 안 되네[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

어려서부터 길들여 타고난 천성처럼 만들어야 하지. 마치 어린 나무에 버팀목을 받쳐 곧게 세워 주면 크게 자라서는 줄기를 일부러 구부러뜨리려고 해도 굽혀지지 않는 것과 같은이치가 될 걸세.

한의학에서 병을 치료할 때, 급하면 바깥 증상을 다스리고 여유가 있으면 근본원인을 다스리는 게 의술의 기본이라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목구멍에 종기가 부어올라 음식도 삼키기 어렵고 숨까지 내쉬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해보세.

그러면 반드시 먼저 그 종기를 풀어 가라앉힌 다음에 병의 근원을 찾아 오장육부를 잘 조리(調理)해야 하지 않겠나? 만약 종기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우선 당장 사람이 죽을 판인데, 설사 병을 뿌리채 뽑을 수 있는 훌륭한 처방과 신령스런 약초가 있다고 할지라도 어느 세월에 써볼 재간이 있겠나?

인과응보의 법칙은 바로 지금 세상의 종기를 가라앉히는 미묘한 법문일세. 그러나 인과법칙은 증상과 근원을 함께 치료하는 약이네. 낮은 근기의 초보자는 잘못을 고쳐 선행을 닦아 나갈 수 있으며, 높은 근기의 통달자는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할[斷惑證眞]수 있는 만병통치약인 셈이지. 아래서는 어리석은 범부나 아낙으로부터 위로는 부처의 과보를 원만히 성취하기까지 한결같이 이 인과법칙의 보약을 떠날 수 없으니, 어찌 단지 바깥 증상만 치료할 뿐이겠는가?

인과응보의 법칙은 세간이나 출세간의 성현 모두가 평범을 갈고 닦아 성스러움을 정련(精煉)해낸 거대한 용광로와 같네. 만약 맨처음에 인과법칙의 궁리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설사 선종과 교학(敎學)에 통달한 뒤라도 인과응보의 사슬에 잘못 걸려드는 수가 있지. 한번 인과응보에 잘못 걸리면, 타락은 분명한데 거기서 헤어나 올라 올 길은 참으로 막연하게 되네.

인과응보의 원리가 너무 얕고 쉽다고 무시하지 말게나. 여래가 정각을 이루는 것이나 중생이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 모두 인과응보의 테두리를 벗어남이 결코 없으니 말일세. 범부의 마음이 비좁아 경전에서 거창한 인과응보를 설한 내용은 혹간 잘 이해하고 깨닫기 어려울지도 모르네. 그렇다면 마땅히 세간의 가깝고 쉬운 내용을 통하여서 그러한 뛰어난 법문에 들어가는 방편으로 삼아야 할 걸세. 예컨대 「문창음질문(文昌陰질文)」이나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같은 글은 익숙하게 읽고 음미하여 실행한다면 누구나 모두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네. 또 「안사전서(安士全書)」도 정말로 세상을 정화하고 백성을 선도하는 중요한 책일세.

당(唐)나라 때 백거이(白居易)가 조과(鳥과)선사에게 물었네.

“어떠한 것이 부처님 법문의 대의(大意)입니까?”

조과 선사가 대답했네.

“어떠한 악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

그러자 백거이가 놀라 물었네.

” 이 두 구절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오?”

이에 조과 선사가 이렇게 답변했네.

“비록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말하기는 쉬워도, 여든 넘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소.”

우리는 이 말이 불법을 배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가르침인 줄 알아야 하네. 사실 이 두 구절은 삼세 모든 부처님의 가장 간략한 계율 경전(戒經)일세. 절대로 천시하거나 소홀히 하면 안 되네. 모름지기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일으키는 곳으로부터 자세히 살펴야 하네. 만약 이러한 공부를 끝까지 확장 발전시킨다면 위로 불도를 이룰 수 있지. 하물며 그 밖의 복록이나 지혜 따위 같은 과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계율과 선행을 내보이는 것은 인간과 천상을 여는 탄탄대로요, 인과응보를 밝히는 것은 화를 피하고 복으로 나아가는 최상계책이라.

불교의 오계(五戒)를 유교의 오상(五常)으로 대비하면, 산 목숨 해치지 말자(不殺)는 인(仁)이고, 남의 물건 훔치지 말라[不盜]는 의(義)며, 사음하지 말라[不邪淫]는 예(禮)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는 신(信)이며, 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는 마음이 늘 맑고 뜻이 엉기되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고 이치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니 곧 지(智)가 될 걸세.

오계를 모두 잘 지니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인간세상(人道)에 태어나게 되니, 이는 유교의 오상과 대체로 같네. 다만 유교에서는 오직 그 뜻만 다하고 있을 뿐인데, 불교는 그로 말미암는 과보까지 함께 밝혀 주는 것이 조금 다르지.

십선(十善)에는 죽이지 않고[不殺], 훔치지 않고[不盜], 사음하지 않는[不邪淫] 세 가지 신업(身業)과, 거짓말 않고[不妄語], 번지르르한 말(음담패설 포함) 않고[不綺語], 두 말(이간질) 않고[不兩舌], 험담(욕설) 않는[不惡口] 네 가지 구업(口業)과, 욕심 부리지 않고[不貪], 성질 부리지 않고[不瞋], 어리석음 부리지 않는[不癡] 세 가지 의업(意業)이 있네.

이는 대체로 오계와 같지만, 오계가 다분히 몸을 추스리는 것이라면 십선은 다분히 마음을 추스리는 점이 조금 다를 걸세. 십선을 모두 갖추면 틀림없이 천상세계에 생겨나게 되네.

부모에게는 자애를 말하고 자녀에게는 효성을 일깨우며 형제에게는 우애를 일러주는 따위의 각종 윤리도덕의 가르침은 모두 사람들에게 각자 분수를 지키고 도리를 다하도록 권장하여, 세간의 모습과 형편에 따라 출세간의 법을 닦도록 인도하는 것이네.

불교에서 인과응보의 원리가 터럭끝만큼도 어그러지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거나 천상에 생겨나는 것 모두 사람들이 스스로 불러들이는 과보임을 널리 밝히는 것은, 여래께서 지극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모든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 오직 즐거움만 누리도록 인도하기 위해서지, 그래서 광장설(廣長舌)을 드러내는 수고로움도 아끼지 않으시고 중생을 위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설하신 거네.

경전에 “보살은 원인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결과를 두려워한다[菩薩畏因, 衆生畏果].”고 하였네. 정말 괴로운 결과를 받고 싶지 않다면 모름지기 먼저 나쁜 원인을 끊어야 하지 않겠나? 만약 항상 착한 원인만 닦는다면 틀림없이 즐거운 과보만을 늘 받게 될 걸세.

이는 서경(書經)에서 “착한 일을 하면 상서로움이 내리고 착하지 아니한 일을 하면 재앙이 내린다(作善降祥, 作不善降殃).”고 한 말이나, 주역(周易)에서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 넘치고, 악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남아 넘친다(積善之家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殃).”고 한 말과 다를 게 없네.

다만 유교에서는 오직 현세와 자손의 관점에서만 언급하였는데, 불교에서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걸친 인과응보를 빠짐없이 두루 논하는 게 틀릴 뿐이지.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황당하거나 허망한 말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눈먼 봉사가 길잡이를 등지고 제 스스로 험한 길을 더듬어 가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구덩이에 빠지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배기겠는가?

인과응보의 법칙을 제창함은 천지와 성인의 마음을 받들어 행함으로서 전 세계 인류의 도덕과 인의(仁義)의 덕성을 완성시키는 일이네. 만약 인과응보를 황당하거나 허망하여 돌아볼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면, 이는 단지 천지와 성인의 마음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정신의식도 영원히 악도에 떨어뜨리는 것이 되네.

그러면 상근기의 지혜로운 자도 뜻을 분발하고 제때 민첩하게 덕성을 닦을 수 없으며, 하근기의 어리석은 자는 거리낌없이 죄악을 자행하여, 천지와 성인이 만물을 기르고 교화시키는 권능도 억눌려 드러나지 못하고, 우리 인간의 마음에 본지부터 갖추어진 이성도 파묻혀 나타나지 못하게 될 걸세.

그 폐단을 어찌 말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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