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문중에 입문한 사람은 누구든지 “부처님을 우러러 생각하고, 그 지혜를 한결같이 엎드려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전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하지만 수행문에 따라 믿음을 성취하는 데는 차별이 있습니다. 염불수행에서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믿고 무량한 자비광명에 대한 믿음을 결정하는 것이 신성취(信成就)입니다. 이 믿음을 성취한 다음 단계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발보리심 혹은 발심(發心)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발심으로 인하여 삼신을 갖추셨습니다. 첫째는 법신(法身)이니 원심(圓心)을 증득하셨습니다. 둘째는 보신(報身)이니 만선(萬善)을 감득(感得) 하셨습니다. 셋째는 화신(化身)이니 인연따라 출현하십니다. 법신은 무수한 번뇌를 모두 다 끊고 원심을 증득한 체(體)입니다. 원심은 곧 일심(一心)입니다. 보신은 무량한 선법(善法)을 모두 다 닦은 상(相)입니다. 무량한 공덕을 갖춘 것입니다. 화신은 무변한 중생을 모두 다 구제하는 용(用)입니다. 삶의 모습과 근기에 따라 방편을 보여 교화하십니다. 이 삼신을 꽃피우는 씨앗이 보리심이니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심 혹은 발보리심이란 무엇인가? 보리(菩提)는 범어인 보디(bodhi)를 음역한 것으로 ‘깨달음의 지혜’라고 해석합니다. 발보리심(發菩提心)은 삼신을 성취하고자 일으킨 마음인데, 이로써 무상도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발심은 지혜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무수한 번뇌를 모두 다 끊기를 원하고, 무량한 선법을 모두 다 닦기를 원하고, 무변한 중생을 모두 다 구제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궁극적이고 참다운 지혜는 번뇌를 멸진할 뿐 아니라, 선법을 닦아 중생을 구제하는, 곧 해행(解行)이 일치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대승은 자각이든지 자비광명에 의지함이든지 어떤 수행문에서도 반드시 발심해야 합니다. 발심은 대승의 관문이요, 근본정신이며, 대승불교의 실천철학입니다. 발심이 곧 대승이요, 정각입니다.
원효는 <무량수경종요>에서 정토에 왕생하는 정인(正因)은 보리심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마음의 열매가 되는 과보는 비록 보리이지만 그러나 꽃이 되는 과보는 정토에 있다. 왜 그런가 하면 보리심의 양은 광대하고 끝이 없으며 길고도 멀어 무한하다. 그러므로 능히 광대하고 가없는 의보(依報 : 유정이 의지하는 국토)의 정토와 장원하고 무량한 정보(正報 : 유정의 몸)의 수명을 감득한다. 보리심을 제외하고는 저 의보와 정보를 능히 감당할 수 없으므로 이 마음을 설하여 정토왕생의 정인(正因)으로 삼았다”라고 했습니다.
불법문중에는 삼보에 귀의한다고 말하면서도 지혜는 구하지 않고 복만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는 삿된 믿음의 무리입니다. 지혜를 구하지만 반신반의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는 믿음이 성취되지 않은 때문입니다. 믿음을 성취하여 발심하였으나 곧잘 물러서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는 이치를 모르고 발심한 때문입니다. 이치를 깊이 이해하고 지혜를 원하는 순리발심(順理發心)에 이르면 곧 정각(正覺)입니다. 십해초발심주에 올라 범부의 경계를 뛰어넘습니다. 염불선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일심을 증득하고자 수행합니다.
양산/정토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