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 가운데 정토문은 고뇌와 죄장으로 불안해하는 생명에게 안심과 희망을 부여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원효도 일심 증득을 수행의 궁극으로 삼았지만 깨달음의 문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믿음을 성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원효는 <기신론소>에서 “신성취(信成就) 발심은 십해(十解: 보살계위 제11~20위)의 자리에 있으면서 겸하여 십신(十信: 보살계위 제1~10위, 범부단계)을 취합니다. 십신의 자리 가운데서 신심을 닦아 익혀서 신심이 결정되어 결정신심(決定信心)을 일으켜 십주(十住=十解)에 들어가기 때문에 신성취 발심이라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결정된 믿음이 없으면 지혜를 얻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킬 수 없고, 깨달음의 문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우선 믿음을 성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근이 깊고 예리한 근기는 쉽게 믿음을 성취하고 발심할 수 있지만, 대부분 욕망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탐진치와 오욕을 떠나게 하는 부처님의 지혜를 결정하여 믿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신론>에서도 “업의 과보를 믿어 능히 십선을 일으키고,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여 무상보리를 구하고자 하니 부처님을 만나게 되어 친히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을 수행하여 일만 겁을 지나서 신심이 성취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범부가 신심을 성취하는 것의 어려움을 말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일체 중생이 쉽게 일심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수행문이 정토문과 염불수행이며, 원효는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하였습니다.
원효는 범부를 위해 간단명료하게 가르침을 펴보였으니, 부처님 지혜의 궁극은 “일체 경계는 일심”이라는 것이며,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진실로 믿고 염불하면 일심의 바다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설령 아직 정토에 왕생하지 못하였고, 일심을 증득하는 길이 요원할지라도, 자신이 아미타불의 무량한 자비광명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진실로 믿고, 그 믿음을 성취하여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염불수행에서 믿음이란 첫째는 모든 수행의 궁극인 “일체 경계는 일심인 지혜”이며, 둘째는 “무량한 자비광명”입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지혜를 결정하여 믿음으로써 안심(安心)을 얻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무량한 자비광명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진실로 믿기 때문에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확신하고 안심을 얻습니다. 염불수행을 통해 정토에 왕생함으로써 반드시 일심의 바다에 나아갈 있기 때문에 깨달음의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믿음을 성취하여 안심을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신행생활의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수행문에서 일념으로 정진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거나, 현실적 기복을 말하는 곳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안일하게 다음 생을 기약하는 등의 신행 태도는 모두가 결정된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결정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합니다. 오늘날 의혹 많은 범부들은 믿음을 성취하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불안한 이 시대에는 우선 깨달음 이전에 결정된 믿음으로 안심을 얻는 법이 무엇인지 궁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양산/정토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