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10. 승가(僧伽)스님

서력기원 708년 당나라의 중종(中宗)황제가 승가(僧伽)대사를 국사(國師)로 모셨습니다.

대사의 속성은 하(何)씨인데, 어느 때는 몸을 크게도 나투고 어느 때는 작게도 나투고 또는 십일면 관세음보살(十一面觀世音菩薩)의 얼굴로도 나투고 하여 그 기이한 행동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710년 3월 2일에 돌아가시자 중종이 장안 근처의절에다 그 육신을 모셔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며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도성 안을 덮어서 사람들이 코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중종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신하들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대사가 본래 사주(泗州) 보광왕사(普光王寺)에 많이 계셨는데 죽은 육신도 그리로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라고 신하들이 황제께 아뢰었습니다.

그래서 중종은 향을 피우고 마음으로 축원하기를, “대사의 육신을 보광왕사로 모시겠습니다”하자, 잠깐 사이에 온 장안에 향기가 진동하였습니다.

그해 오월 보광왕사에다 탑을 세우고 대사의 육신을 모시니, 뒤로 탑 위에 자주 나타나서 일반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탑에 와서 소원성취를 빌게 되었고 그럴때마다 가서 탑 위에 모습을 나타내곤 하였는데, 그 얼굴이 웃음을 띠우고 자비로우면 소원성취하고 찡그리면 소원성취하지 못하는 등 신기한 일이 많아서 세상에서 부르기를 사주대성(泗洲大聖)이라 하였습니다.

또 799년 7월에는 궁중에 나타나서 그 때에 천자로 있던 대종(代宗)에게 법문을 하였습니다. 이 일로 대종이 크게 감격하여 그 화상(畵像)을 그려 궁중에 모셔놓고 항상 예배하였습니다.

822년에는 큰 화재가 나서 대사의 탑이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대사의 육신은 조금도 상함이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869년, 나라 안에 큰 난리가 났을 때에, 도적들이 사주(泗洲)로 쳐들어오다가 대사가 탑 위에 몸을 나타내자 놀라서 다 물러갔습니다. 당시 의종(懿宗)황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증성대사(證聖大師)라는 호를 올렸습니다.

1119년 당나라의 서울에 대홍수가 났을 때였습니다. 대사가 또 궁중에 나타나므로 천자인 휘종(徽宗)황제가 향을 꽂고 예배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사가 육환장을 흔들며 성(城) 위로 올라가니, 성 안의 온 백
성들이 다 보고 기꺼워하는 가운데 큰 물이 곧 빠져버렸습니다.

이상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을 몇 가지 보기를 든 것일뿐으로, 그밖에도 기이한 사적(事蹟)은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듯이 승가대사가 사후에 보광왕사의 탑 위에 그 모습을 자주 나타낸 사실은 그 근
방 사람들이 다 보게 됨으로써 천하가 잘 아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실이 확실하여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가리켜 ‘사주 사람들이 대성을 보듯 한다(泗洲人見大聖)’는 관용구까지 생겨나게 된 것을 세상이 다 잘 아는 바입니다.

性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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