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야기한 ‘불생불멸’이라든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든지 ‘무애법계’라고 하는 이론들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中道法門)’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이러한 불생불멸의 뜻을 전하는 화엄 및 법화사상은 대승경전의 말씀들인데, 이 경전들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수백 년이 지나서 편집된 것이므로 더러 잘못된 것이 없나 하는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설령 부처님이 살아 계시던 무렵에 편집되었다 하더라도 더러 잘못 듣거나 잘못 기록하여 오전(誤傳)이 있을 수가 있거늘, 하물며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수백 년 뒤에 편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틀림없는 부처님의 사상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좀 억지스럽지 않은가 하는 의혹이 얼마든지 일어날수 있습니다.
학자들이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한 결과, 한때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직설(直設)이 아니라는 말이 나돌게되었습니다. 이름하여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 대두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대신에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곧 성립된 경전인 <아함경>에서 부처님의 사상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과연 <아함경>을 열심히 연구해보니 처음에는 이 경전에서 표현된 부처님의 사상은 대승불교의 사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듯이 보였습니다. <아함경>을 부처님의 사상 그대로라고 한다면, 대승불교는 그 <아함경>에서 발달된 사상일 뿐이지 실제의 부처님 사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뭏든 뒤에 연구를 거듭해나가 보니 <아함경>에도 부처님의 친설(親設)이 아닌 것이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이름난 권위자들이 더욱 깊이 연구를 한 결과, 원시 경전인 팔리어 경전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설한 것이라는 증거를 가진 초기의 법문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돌 무더기 속에서 금이나 옥을 발견해낸 것과 같았습니다. <아함경> 중에서도 <잡아함경> 같은 데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은, 당시 인도의 여러 사상을 종합해 볼때, 틀림없는 부처님의 사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부처님의 생활을 기록해 놓은 율장에서 그에 대한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초전법륜(初轉法輪)은 부처님께서 맨처음으로 법문하신 것인데, 깨달음을 성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동시에 교단을 조직하신 그 출발점부터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成道)하신 뒤에 혼자만 좋은 법을 알고 있을 수는 없기에 그 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좋은 법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서 그들도 함께 깨닫고 자신과 같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수행하던 중에 고행이 결코 도(道)가 아님을 알고 방향을 전환하였을 때에 부처님을 떠나버린 다섯 비구를 맨 처음에 찾아갔습니다.
처음에 그들 다섯 비구는, 부처님이 타락하였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을 찾아오고 있는 부처님에게 인사도 하지 말자고 약속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부처님이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자, 스스로 한 약속을 잊어버
리고, 대법(大法)을 성취한 만덕종사(萬德宗師)이신 부처님께 오체투지(五體投地)로, 곧 온몸을 땅바닥에 대고 머리가 깨어지도록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부처님을 자리에 모셔놓고 “어찌하여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을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법을 위해서 찾아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대각(大覺
)을 성취하신 것을 맨먼저 그들에게 소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무엇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물으니, 부처님께서는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하였다”고 그 제일성(弟一聲)을 토하셨습니다.
중도,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이 융합되는 것을 말하며, 모순이 융합된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 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모두 상대적(相對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善)과 악(惡)의 상대, 시(是)와 비(非)의 상대, 유(有)와 무(無)의 상대, 고(苦)와 낙(樂)의 상대 등, 이렇듯 모든 것이 서로 상대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현실 세계는 그 전체가 상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 이 현실 세계에서는 모순과 투쟁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 상대의 세계 곧 양 변의 세계에서는 전체가 모순 덩
어리인 동시에 투쟁인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세계는 불행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행에서 벗어나고 투쟁을 피하려면 근본적으로 양변, 상대에서 생기는 모순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이를테면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시비(是非)를 버리면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이른바 사바고해(娑婆苦海)인 까닭에 그 양변을 여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중도를 정등각하였다”고 선언하신 것은 바로 그 모든 양변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곧 나고 죽는 것도 버리고, 있고 없는 것도 버리고, 악하고 착한 것도 버리고, 옳고 그른것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 버리면 시도 아니고 비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절대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상대의 모순을 모두 버리고 절대의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대자유이며 성불인 것입니다.
모든 대립 가운데에서도, 철학적으로 보면, 유(有) 무(無)가 가장 큰 대립입니다. 중도는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닙니다. 이것을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하니, 곧 있음과 없음을 모두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 납니다(亦有亦無). 그 뜻을 새겨 보면 이러합니다. 곧 3차원의 상대적인 유와 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4차원에 가서 서로 통하는 유무가 새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무가 서로 합해집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有蕪合故名爲中道].”
불생불멸의 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서로 생멸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서로 융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有卽是無, 無卽是有)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내용을 그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니 그들은 짧은 시일 안에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초전법륜입니다. 이렇듯이 초전법륜의 근본 골자는 중도에 있습니다. 괴로움과 즐거
움을 완전히 버리고, 옳음과 그름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버린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구름이 완전히 걷히면 밝은 해가 나오는 것과 같아서, 거기에는 광명이 있을
뿐입니다. 유와 무를 완전히 버리면 그와 동시에 유와 무가 서로 통하는 세계, 곧, 융통한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눈을 감은 세계에서는 있고 없음이 분명히 상대가 되어 존재 하지만, 눈을 뜨고 보면 유와 무, 곧, 있고 없음이 완전히 없어지는 동시에 유와 무가 완전히 융합해서 통하게 됩니다. 이렇듯 중도의 세계란 유, 무
의 상대를 버리는 동시에 그 상대가 융합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양변을 버리는 동시에 양변을 융합하는 이 중도의 세계가 바로 모든 불교의 근본 사상이며, 그리고 대승불교 사상도 여기에 입각해 있습니다.
一卽一切 하나가 곧 전체이고
一切卽一 전체가 곧 하나이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이 사상도 중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와 일체라는 것은 양 변입니다. 하나와 일체를 버리면 그것이 바로 중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가 되
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엄사상이며 곧 불교 전체의 사상인 것입니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일진법계(一盡法界)를 말한 것은 모두 중도에 입각해 있는 사상입니다.
대승경전이 시대적으로 보아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몇 백년 뒤에 성문화된 것이라고 하여도 그 근본은 부처님의 사상 그대로인 것입니다. 대승경전이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거나 부처님의 사상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 중도에 있는 것과 같이, 화엄과 법화 또한 중도를 그대로 전개시킨 것이니, 그것이 곧 초전법륜이 되는 것입니다.
性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