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집] 제2편 1장 불생불멸(不生不滅) 05. 질문과 답

물음 :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믿는 자는 융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여 절대자인 창조주가 화복(禍福)을 정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업(業)에 따라서 착한 일을 하면 행복하게 되고 악한 일을 하면 불행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해가 어렵습니다.

답 : 예수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만든 이도 하나님이고 따라서 구원도 그에게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누가 만든 사람이 따로 없고 누가 따로 구원해 주지 않습니다. 순전히 자아(自我) 본위입니다. 예수교는 철두철미 남을 의지하는 것이니 두 관점이 정반대입니다. 요즘의 과학적 증명에 의하면 남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말했듯이 예수교에서도 자체 전환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본시 주장하는 것은 우주 이대로가 상주불멸이고 인간 이대로가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며, 또 사람이고 짐승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 사람이 모두 금덩어리 아님이 없는데 자기가 착각해서 금덩어리를 똥덩이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이라는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금덩이인 줄 모르는 것이니 수행을 하여 본래의 눈을 뜨고 보면, 본시 금덩이인 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모두 진금(眞金)이고 모두가 부처님 세계이고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원’한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준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 개발이고, 자기 복귀(復歸)입니다. 자기의 본래 모습이 부처님인 줄을 알라는 것입니
다. 선종(禪宗)의 조사 스님네들이 항상하는 말이 그렇고 또 내가 항상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석가도 믿지 말고, 달마도 믿지 말고, 지금 말하는 성철이도 믿지 말라. 오직 자기를 바로보고, 자기 능력을 바로 발휘시켜라.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그럼, 어째서 부처님은 극락세계 등의 의타(依他)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방편설(方便說)입니다. 자아(自我) 본위를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지 참 가르침은 아닙니다.

물음 : 업(業)의 변화에 의해서 귀하게도 되고 천하게도 되는 것입니까?

답 : 그렇지요.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햇빛 속에 똑바로 나서면 그림자도 바르게 되고 몸을 구부리면 그림자도 구부러지는 것입니다. 바른 업을 지으면 모든 생활이 바르게 되고 굽은 업을 지으
면 모든 생활이 굽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타살(他殺)은 없다, 전부 다 자살(自殺)이라고.

물음 : 불교의 윤리에서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은 어떻게 구별됩니까?

답 : 남을 도우는 것, 남에게 이로운 것은 선(善)이라 하고, 남을 해치는 것,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악(惡)이라 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이란 선과 악을 완전히 버리고 또 선과 악이 융합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중도(中道)의 세계를 말합니다. 선과 악이 대립되어 있는 것은 진정한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쪽에 치우친 변견(邊見)입니다. 보살계(戒)를 받을 때에 “선도 버리고 악도 버려라. 이
렇게 하는 것이 보살이다”고 말합니다. 상대적인 변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럼 선도 버리고 악도 버리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선도 버리고 악도 버리는 여기에 참 선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음 : 도솔천과 극락세계(極樂世界)는 어떤 것입니까?

답 : 도솔천이라고 하는 것은 외계(外界)의 천상(天上)에 있습니다. 그러나 꼭 말씀 그대로 받아들일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미 도솔천이니 33천(三十三天)이니 하는 사상이 있었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그 성질이 다릅니다. 이것은 본시 있는 세계가 아
닙니다. 아미타불의 원력(願力)으로써 극락세계를 만들었습니다. 흡사히 하나님이 하늘이 있으라 하니 하늘이 있다는 식(式)입니다. 아미타불이 원력으로써 만들어 놓은 땅이니 우주창조설과 그 성격이 같은 것입니다.

물음 :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고 불교가 완전무결한 것이라면 앞으로 과학은 불교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답 : 몇헤 전 불교로 전향한 어느 미국 사람이 서울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교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가 과학이 발달할수록 퇴색되고 파괴되는데 비해 불교는 더욱 더 그 논리가실증되는 동시에 빛
이 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교는 진리를 바로 보았기 때문에 3천년 뒤에도 그것이 참말인 것이 자꾸 증명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과학이 발달할수록 불교의 진리가 한가지 한가지씩 계속해서 더 증명이 될 따름이요, 불교 이상의 더 나은 진리를 발견할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손오공이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인 줄을 알아야지요.

물음 : 캐논 경이 쓴 <잠재력>에서와 같이 무의식 상태에서 실험하는 그들도 화두 공부를 한 것입니까?

답 : 그들이 화두 공부를 한 것은 아니고또 완전히 제8식(識)에 도달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실험을 하는 동안에는 무의식 상태에 가깝게 들어간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상태에 들어갈 것 같으면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물음 : 윤회설과 인구증가 및 산아제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 곧 이전에는 인구가 적었는데 지금에는 인구가 많다 하니 이것은 영혼이 어떻게 된 것인가? 사람이 반드시 사람으로만 윤회한다면 이것은 문제가 큽니다. 사람만이 사람으로 윤회한다면 인구가 증가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회를 하는 데에는 동물과 인간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외계에서 오는 영혼도 있고하여 전체적으로는 증감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지구에서 인구가 자꾸 팽창해 가니 산아제한을 해서 위기를 면해야겠다고 인위적으로 노력을 하는데 그것 가지고 해결이 안 됩니다. 산아제한한다고 사람이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건설적으로 나아가야지 산아제한은 파괴적입니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많아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가 노력하고 개척하고 개발하면 아무리 인구가 많아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물음 : 불성(佛性)이란 무엇입니까?

답 : 이것은 불교의 독특한 용어(用語)인데, 부처님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을 불성(佛性)이라 하고, 일체법계(一切法界)를 말할 때는 법성(法性)이라 하는데 일체만법의 본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이 법성을 바
로 안 사람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것은 변동이 없으므로 진여(眞如)라 하기도 하고, 그 내용은 중도(中道)이므로 중도라 하기도 하고, 활동하는 자체는 연기에 따라 움직이므로 연기법(緣起法)이라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희한하고 희한하구나, 모든 중생(衆生)이 두루 불성을 갖고 있구나.”

性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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