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영원한 행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단조롭고 지혜가 크게 발달되기 전에는 훌륭한 사람이 나와서 천당설을 이야기하면 아무런 의심없이 믿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차츰 차츰 인간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사람들은 지혜가 늘고 또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면서, 그러한 일방적인 가르침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믿음을 잃게 되니 사람들은 자연히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천당이 어디에 있어. 무슨 하나님이 있다는 거야. 인간들이 현실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니 위안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지.”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정해 버리면 종교의 기반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절대 세계의 영원한 행복을 증명해 보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신학자들은 합리(合理), 불합리(不合理)를 논하지 말고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니 무조건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신학자가 성(聖) 어거스틴 St. Augustine입니다. 그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바로 절대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와 같은 절대적인 믿음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국민학생에게는 고등수학이 믿기 힘든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한 천당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학자들의 그 뛰어난 영혼과 깊은 지혜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이 다만 소견이 좁아서 그 존재를 의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소견으로 합리, 불합리를 따질 것이 아니라 무조건 믿으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절대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사상을 지배하며 그 생명을 이어 왔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사회적 상황이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지(人智)가 자꾸 발달되자 절대 세계에 대해서, 또 신(神)의 존재 여부를 비롯한 신의 문제에 대해서 자꾸 회의적인 생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이리저리 펼쳐보아도 하나님이나 천당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회의적인 생각이 점점 크게 일자 그것이 마침내는 종교의 근본을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과학의 발달로 그 전에는 신비롭게만 여기던 자연 현상이나 우주의 모습이 신의 신비로운 조화가 아닌,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임이 밝혀짐에 따라 인간이 갖게 된 당연한 변화입니다. 우주의
모습까지 밝혀낸 현대에 와서 맹목적으로 하나님이나 천당을 믿으라고 하는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쉽사리 통하지 않는, 설득력 없는 강요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냥 믿으라고만 강요하기에 앞서 무엇인가 객관적으로 사실을 증명해야만 비로소 믿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종교가 그 생명을 유지하려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는 뚜렷한 이론 체계를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객관성이 없는 이론은 그야말로 아무 근거도 없는 공론(空論)이라 하여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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