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집] 제1편 1장 종교(宗敎)의 목표(目標) 03. 맹상군

호화코 부귀코야 맹상군만 하련마는
백년이 못다하여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요.

맹상군은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사람인데, 왕자(王者)로서 정승을 지낸 이로, 천하의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녔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가장 호화롭게 산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누구나 이구 동성으로 맹상군이라고 말할 만큼 참으로 세상의 행복을 누리며 산 사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맹상군도 백 년을 못 살고 일흔이 가까와서 죽고 말았습니다. 살았을 적의 그의 공명에 따라 장례를 후히 지내고 그 무덤도 산과 같이 거창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것이 덧없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 이제는 무덤 옆에 밭을 갈던 농부가 제 땅을 넓히려고 맹상군 무덤 위에다가 밭을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 것인지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온갖 영화를 다 누리며 호화롭게 살던 맹상군도 그러한데 하물며 특별히 두드러진 것 없이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 유명한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의 경우는 또 어떠한지 봅시다. 그는 춘추전국 시대의 맹상군보다 후대의 사람으로 6국(六國)을 정벌하고 중국 천하를 통일하여 진(秦)나라 대 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영웅 가운데 영웅입니다.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보니 모든 것이 자기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좋은 물건, 좋은 음식, 좋은 옷, 미인들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자기가 거처하는 궁궐을 지어 아방궁(阿房宮)이라 불렀는데 집의 길이가 무려 칠백 리에 뻗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한양의 궁궐 둘레가 사십 리라고 하니 진시황의 궁궐둘레는 천 리가 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뒷날 항우(項羽)라는 장사가 나타나서 진나라를 패망시키고 아방궁을 불태우는데 석달 동안이나 탔다고 합니다. 집이 다 타는 데에 석달이나 걸렸으니 아방궁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시황이 그렇듯 천하를 자기 것으로 하여 호사스럽게 살면서도 딱 한 가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자기 목숨이지만 이것만큼은 자신의 권세로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기운은 자꾸 쇠약해져서 마침내는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에 영(令)을 내려 죽지 않는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는 사람에게는 수만 금의 상금을 주고 벼슬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얼마 뒤에 서시라는 사람이 나타나 진시황에게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가면 바다 가운데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불사초라고하는 약초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시황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 약초를 캐오는 데에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서 씨가 대답하기를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삼천 명과 그들을 싣고 갈 배만 준비해 주시면 가서 불사초를 구해 오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진시황은 곧 영을 내려, 서 씨의 요구대로 동남동녀 각 삼천 명과 그들이 먹을 식량과 의복 따위를 수십 척의 배에 실어 보내어 삼신산의 불사초를 캐오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씨의 생각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그는 진시황이 호사가 넘치다 보니 사람의 힘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공연한 짓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堯)나라의 팽조(彭祖)가 팔백 년을 살았지만 끝내 죽고 말았는데 자기가 살면 얼마나 살 것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한 그는,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욕망에 집착한 진시황의 약점을 이용하여,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데리고 저 바다 가운데 좋은 섬에 가서 자기의 왕국을 하나 만들어 잘살아 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리하여 만든 나라가 일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남쪽, 남해 금산 밑에 가면 바위에 ‘서씨각(徐氏刻)’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씨가 중국을 출발해서 남해 앞을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록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어찌하였든 서 씨는 그렇게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배에 싣고 제 갈길로 가 버렸고, 이를 알 리가 없는 진시황은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불사초를 구해오기만 기다렸습니다. 결국 진시왕은 자기가 서 씨에게 속은
것을 알고 원통해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렸습니다. 제 아무리 진시황이라도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죽어도 그냥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서, 죽고 난 뒤에 자기의 무덤을 생전의 아방궁처럼 꾸미도록 엄명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여산(驪山)에 터널을 뚫고 산 밑의 흙을 다 파내고 지하 궁궐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죽은 뒤에도 음식을 차려 놓고, 궁녀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게 생긴 궁녀 삼천명을 뽑아 언제든지 자기 옆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자기의 무덤이 있는 방을 지킬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진시황이 죽고 난 뒤에 신하들은 그의 명령대로 궁녀 삼천 명을 뽑아 묘를 지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봉해 버렸습니다.

얼마 뒤에 유방과 항우가 들고 일어나 진나라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항우가 먼저 함양에 들어가 아방궁을 불 태우고, 여산의 묘를 파헤쳐서 그 속에 갇혀 있던 삼천 명의 궁녀들을 살려 주어 제 갈 길로 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우도 그 삼천 명의 궁녀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궁녀는 남 주기가 싫어서 자기가 차지했으니, 그 미인이 천하에 유명한 우미인(虞美人)입니다. 나중에 항우가 유방과 싸우다가 해하(咳下)에서 대패하고 오강(烏江)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천하를 덮어도
때가 이롭지 못하니 천리마도 앞을 달리지 않는구나.
천리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거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나는 장차 어찌할거나.

항우가 당장 망해서 죽게 되었는데 천리마는 버려도 우미인은 버리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마침내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이같이 허무할 뿐만 아니라 그 욕심으로 인해 자기와 남에게도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진시황의 아방궁을 짓고 거대한 무덤을 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했겠습니까!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눈물 위에서 진시황은 일시적인 행복은 누렸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삼천 궁녀를 그 속에 가둬 춤추게 하는 등 별별 짓을 다했어도, 결국 영원한 행복은 성취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어떠한 한계도 없는 영원한 행복을 구하고자 했으면서도 그 행복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이런 일들이 앞에서 본 록펠러나 맹상군이나 진시황에게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그런 처지에 놓이면 그와 같은 욕망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곧 죽게 된 사람도 죽음을 피하고 좀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서 아무리 강한 권력이나 명예나 금력을 가졌다고 해도 실지로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해답을 주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인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나가는 데에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종교가 인간이 원하는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性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