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중도의 원리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위 게송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반야심경”의 한 구절입니다.

색이란 유형을 말하고 공이란 것은 무형을 말합니다.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유형과 무형이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예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 가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나곤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입니다. 이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 무형에서 유형으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 요즘 흔히 ‘4차원 세계’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 4차원 세계라는 것도 상대성 이론에서 전개된 것으로, 이것을 수학으로 완전히 공식화한 사람은 민코프스키(H. Minkop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 강연에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를 들어 ‘오늘, 해인사에서…’ 할 때에 ‘오늘’이라는 시간과 ‘해인사’라는 공간 속에서 이렇게 법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은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일상생활인데, 그런 분리와 대립이 소멸하고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이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변을 떠나서 양변이 서로서로 거리낌없이 통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해 버리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즉 시공 융합의 세계로서 민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 정도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든지 ‘불생불멸’이라든지 ‘무애법계’니 하는 이런 이론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녹아원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이 “내가 중도를 바로 깨쳤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중도’,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이 융합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순이 융합된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보통 보면 선과 악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데, 불교의 중도법에 의하면 선악을 떠납니다. 선악을 떠나면 무엇이 되는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서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선이 즉 악이고, 악이 즉 선으로 모든 것이 서로 통합니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아까 말한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는 식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도법문이라는 것은 일체 만물, 일체 만법이 서로 서로 융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모순과 대립을 완전히 초월하여 전부 융화해 버리는 것, 즉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던 질량과 에너지가 융화되어 한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중도’라 하면 ‘중도는 중간이다’하는데, 그것은 불교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라 하는 것은, 모순 대립된 양변인 생멸을 초월하여 생멸이 서로 융화하여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이 되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때 에너지는 멸하고 질량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생이 즉 별인 것입니다. 질량이 생겼다는 것은 에너지가 멸하였다는 것이고, 에너지가 멸하였다는 것은 질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멸이 완전히 서로 통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종합해 본다면, “불교의 근본은 불생불멸에 있는데 그것이 중도이다. 그런데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관념론인가? 관념론은커녕 실증적으로, 객관적으로 완전히 입증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가 그것을 분명히 입증했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참으로 과학적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과학적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중도란 모든 대립을 떠나서 대립이 융화되어 서로 합하는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철학적으로 보면 대립 중에서도 유무가 제일 큰 대립입니다.

‘있다’ ‘없다’ 하는 것, 중도라고 하는 것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닙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난다는 식입니다. 그 말은 3차원의 상대적 유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4차원에 가서 서로 통하는 유무가 새로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유무가 서로 합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서로 생멸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서로 융합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워낙 어려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저 멀리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저 하늘의 구름같이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자물리학에서 실제로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인 불생불멸의 원리가 실험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니 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아니고 아니고 우리가 언제든지 손을 잡을 수 잇고 만져 볼 수 있는 그런 원리라는 말입니다. 이런 좋은 법이지만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알아보려는 사람도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흔히 중도를 변증법과 같이 말하는 데, 헤겔(F. Hegel)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직접 상통합니다. 즉 보든 것이 상대를 떠나서 융합됩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즉 없는 것, 없는 것이 즉 있는 것, 시가 즉 비, 비가 즉 시가 되어 모든 시비, 모든 투쟁, 모든 상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대립을 떠난다면 싸움할래야 싸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극락이고 천당이고, 절대세계입니다. 그래서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다” 이 말입니다. 보통 피상적으로 볼 때 이 세간이라는 것은 전부가 자꾸 났다가 없어지고, 났다가 없어지고 하는 것이지만 그 실상, 즉 참모습은 상주불멸,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의 원리는 어디서 꾸어 온 것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우주 전체 이대로가 본래 불생불멸입니다.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인 것을 확실히 알고 이것을 바로 깨치고 이대로만 알아서 나간다면 천당도 극락도 필요없고,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현실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사바세계 그대로가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의 세계를 딴 데 가서 찾으려 하지 말고 자기 마음의 눈을 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태양이 온 우주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고 참다운 절대의 세계를 놔두고 ‘염불하여 극락간다’, 예수 믿어 천당 간다’ 그런 소리 할 필요가 없습니까? 바로 알고 보면 우리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경계선은 어디 있는가? 눈을 뜨면 불생불멸 절대의 세계이고, 눈을 뜨지 못하면 생멸의 세계, 상대의 세계이어서 캄캄한 밤중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서로 노력해 마음의 눈을 완전히 뜨자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마음의 눈을 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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