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중생과 부처

불교라고 하면 부처님이 근본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부처라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좀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원리원칙을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번뇌망상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고 일체의 망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모든 망상을 떠났으므로 망심이 없는데, 이것을 무심이라고 하고 무념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이란 망상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이라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저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비롯하여 십지등각까지 모두가 중생입니다. 참다운 무심은 오직 제8아뢰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끓은 구경각, 즉 묘각만이 참다운 무심입니다. 이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면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니 망상이 어떤 것인지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통 팔만사천 번뇌망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구분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입니다. 생각이 왔다 갔다,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이것이 의식입니다. 둘째는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떠난 아주 미세한 망상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을 제6식이라 하고 무의식을 제8식이라고 하는데, 이 무의식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8지보살도 자기가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아라한도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며, 오직 선불한 분이라야만 근본 미세망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곤충 미물에서 시작해서 십지등각까지 전체가 망상 속에서 사는데, 7지보살까지는 의식 속에서 살고 8지 이상 10지등각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삽니다. 의식세계든 무의식세계든 전부 유념인 동시에 모든 것이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제8아뢰야 망상까지 완전히 끓어 버리면 그때가 구경각이며, 묘각이며, 무심입니다.

무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본래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합니다. 거울은 언제든지 항상 맑습니다.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망상은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마찬가지이고, 무심이란 것은 거울 자체와 같습니다. 이 거울 자체를 불성이니 본래 면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망상을 다 버린다는 말은 모든 먼지를 다 닦아 낸다는 말입니다. 거울에 낀 먼지를 닦아 내면 환한 거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맑고 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우리 마음도 이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제8아뢰야식까지 완전히 떨어지면 크나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구름 속의 태양과 같습니다. 구름이 다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고 광명이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모든 망상이 다 덜어지면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시방법계를 비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일체 망상이 모두 떨어지는 것을 ‘적’이라 하고,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데 이것을 ‘조’라 합니다. 이것을 적조 혹은 적광이라 하는데, 고요하면서 광명이 비치고 광명이 비치면서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해인사 큰법당을 ‘대적광전’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무심이라고 해서 저 바위처럼 아무 생각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서 동시에 광명이 온 법계를 미추는 적조가 완전히 구비되어야 참다운 열반입니다. 고요함만 있고 비춤이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고 외도입니다. 일체 망상을 떠나서 참으로 견성을 하고 열반을 성취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는데, 이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해탈이란 결국 “기신론”에서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한 대로 ‘일체 번뇌망상을 다 벗어나서 구경락인 대지혜 광명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상으로써 성불이 무엇인지 무심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불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본이 성불에 있는만큼 실제로 적조를 내용으로 하는 무심을 실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근본은 누구든지 다 평등합니다.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항상 말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명경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것은 새삼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고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명경은 본래 청정합니다. 본래 먼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광명이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그러니 광명의 본체는 참다운 무심인 동시에 적조, 적광, 정혜등지이고 불생불멸 그대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참으로 청정하고 적조한 명경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무리 깨끗한 명경이라도 먼지가 앉으면 명경이 제 구실을 못합니다. 그러나 본래 명경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먼지가 앉아 있어서 보든 것을 비추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명경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먼지만 싹 닦아 버리면 본래의 명경 그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명경이 보래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성이 보래 청정한데 어찌해서 중생이 되었나? 먼지가 앉아 명경의 광명을 가려 버려서 그런 것뿐이지 명경이 부숴진 것도 아니고 흠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먼지가 앉아서 명경이 작용을 완전하게 못 한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다운 명경을 구하려면 다시 새로운 명경을 만드는 게 아니고 먼지 낀 거울을 회복시키면 되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만 찾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항상 “자기를 바로 봅시다”하고 말하는데, 먼지를 완전히 닦아 버려서 보래 명경만 드러나면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할 때 마음의 눈이란 것도 결국 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천가지 만가지 다르다고 해도 내용은 일체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은 세속의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옛사람들의 책이나 얘기를 들어보면 유교, 불교, 도교 3교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유교라든가 도교 등은 망상을 근본으로 하는 중생세계에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이론, 모든 행동이 망상으로 근본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망상을 떠난 무심을 증득한 것이 우리 불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번지 앉은 명경으로써 말하는 것이고, 불교는 먼지를 싹 닦은 명경에서 하는 소리인데, 먼지 덮인 명경과 먼지 삭 닦아 버린 명경이 어떻게 같습니까? 그런데도 유, 불, 선이 똑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무심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십지등각도 중생의 경계인데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까?

중생의 경계, 그것이 진여자성을 증득한 대무심경계와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유, 불, 선 3교만 말했지만 요즘은 문화가 발달하고 세계의 시야가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온갖 종교가 다 있고 온갖 철학이 다 있는데 그것들과 불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어떤 종교, 어떤 철학 할 것 없이 불교와 같이 무심을 성취하여 거기서 철학을 구성하고 종교를 구성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없습니다. 이것은 재가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떤 큰 철학자, 어떤 위대한 종교가, 어떤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모두가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에서 한 소리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근본인데 부처님이란 무심이란 말입니다. 모든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고 일체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를 부처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심이 근본이니 만큼 불교를 내놓고는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심을 성취해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만큼 불교에는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도 따라 올 수 없는, 참으로 특출하고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망상 속에서 하는 것과 망상을 완전히 떠난 것을 비교해 보면서 생각해 봅시다. 다시 명경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명경에 먼지가 앉으면 모든 것을 바로 비추지 못합니다. 먼지를 안 닦고 때가 앉아 있으면 무슨 물건을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물건을 바로 비추려면 먼지를 깨끗이 닦아 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망상 속에서는 모든 사리, 모든 원리,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지리를 바로 알려면 망상을 벗어나서 무심을 증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구경각을 성취하여 무심을 완전히 증득한 부처님 경계 이외에는 전부 다 삿된 지식이요, 삿된 견해입니다. 대신에 모든 번뇌망상을 완전히 떠나서 참다운 무심을 증득한 곳, 즉 먼지를 다 닦아 낸 깨끗한 명경은 무엇이든지 바로 비추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지정견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은 망상 속에서 성립된 것인만큼 사지사견이지 정지정견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지정견은 오직 불교 하나뿐입니다.

결국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행동도 바로 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 감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앉은 명경이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행동이라 하는 것은 오직 참으로 무심을 증해서 적광적조를 증하기 전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물었을 때, 바로 앉고, 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사는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바로 알고 싶고, 바로 보고 싶고, 바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캄캄해서 눈 감은 봉사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바른 생활을 하자는 것이 불교인데, 망상 속에서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무심을 증해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지등각도 봉사입니다. 왜 그런가?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십지등각이 저 해를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해를 보는 것과 같아서, 비단이 아무리 얇아도 해를 못 보는 것은 보통의 중생과 똑같다.”

그래서 십지등각이 사람을 지도하는 것도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바로 이끌려면 자기부터 눈을 바로 떠야 하고, 바로 알아 바로 행동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간추려 보면,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모든 망상을 벗어난 것을 부처라 합니다. 모든 망상이 없으니 무심입니다. 그러나 그 무심은 목석과 같은 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울의 먼지를 완전히 닦아 버리면 모든 것을 비추는 것과 같으며, 구름이 완전히 걷혀 해가 드러나면 광명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나지 않는 것을 불멸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이 무심은 어떤 종교, 어쩐 철학에도 없고 오직 불교에만 있습니다. 또 세계적으로 종교도 많고 그 교주들의 안목도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만 모두가 조각조각 한 부분밖에 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불교와 같이 전체적으로 눈을 뜨고 청천백일같이 천지만물을 여실히 다 보고 말해 놓은 것은 실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실제 무심을 증해야 되겠습니다. 밥 이야기 천날 만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직접 밥을 떠 먹어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없는 무심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본래 무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내가 자꾸 ‘중생이 본래 부처다’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중생들밖에 없는데 중생이 본래 부처란 거짓말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까 명경의 비유는 좋은 비유가 아닙니까? 먼지가 앉은 중생의 명경이나 먼지가 안 닦인 부처님 명경이나 근본 명경은 똑같습니다. 본시 이 당 속에 큰 금광맥이 있는 것입니다. 광맥이 있는 줄 알면 누구든지 호미라도 들고 달려들 것 아닙니까. 금덩이를 파려고.

우리가 ‘성불! 성불!’하는 것도 중생이 어떻게 성불하겠느냐 할지 모으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니 본래 면목, 본래의 모습을 복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본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니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하여 우리의 참모습인 무심을 실증합시다.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는도다.

세상에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신 것인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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