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의 고독

겨울 사원은 언제나 적막하다.

더욱이 흰눈이 며칠이고 계속 내려 시내로 가는 산길은 흔적도 없어지고, 눈과 나무라는 단조로은 형태로 산이 정리되고 나면 산엔 바람소리밖에 그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 없다. 겨울 산의 바람소리는 쓸쓸하다. 더욱이 황혼이 어둠속으로 묻히고 그림자들이 밤으로 밤으로 밀리는 초저녁의 바람소리는 산사람들의 가슴을 몹시도 심하게 흔들어 놓는다.

그런 날의 승려들의 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이고 왜소하다. 앞뜰의 눈을 쓸고 있는 승려들, 그리고 묻힌 길을 더듬으며 걷고 있는 승려들, 꽁꽁 닫힌 방안에서 불경을 낭랑하게 외고 있는 승려들, 그들의 모습에는 속세를 떠나온 사람들의 떠나왔다는 슬픔이 그리움과 함께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슬픔속에서 그 많은 겨울을 맞이하고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떨쳐버릴 수 없도록 힘차게 몸에 달라붙어 나의 일부분으로 화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즈음, 특히 몇 십년만의 폭설이라고 신문들이 떠들던 69년의 세모 무렵에 도선사에서 선운각까지의 길을 오갈 때의 나의 걸음걸이에는 그 외로움이 더욱 깊이 스며들어있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 체온만으로 추위를 물리칠 힘이 없어 요즈음 나는 몇 겹으로 옷을 껴입는다. 그리고 그위에 장삼을 입고 죽장을 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죽장의 고리에서는 찰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그 죽장을 잡은 바른손은 춥고 꺼칠꺼칠하다. 우수만이 아니다. 나의 볼도 이마도 이미 메마른 노년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마치도 한 그루의 앙상한 고목과도 같다. 그렇게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면서 나는 산길을 걸어 선운각의 다리를 건너 간다. 그 곳에는 한 대의 차가 기다리고 있고, 나는 그 차를 타고 선학원으로 또는 총무원으로 향한다. 그것이 근래의 나의 일과이다.

그러나 그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었다. 어지간히 먼 곳이 아니라면 걸어갔었다. 서울에서 부산이라든가, 광주에서 대구와 같은, 이 끝에서 저 끝과 같은 곳이 아니라면 나는 걸었었고, 승려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여기고 있다. 그 때 이혼수속을 마치고 진주에서 해인사로 갔을 때에도 나는 걸었었고, 그곳에서 서울로 올 때에도 도보 반, 차편 반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걷는다는 말을 강조할까 하고 독자들은 의아해 할지도 모른지만, 그것은 이제부터 기술하려고 하는 부분이, 이 회상기에 가장 많아 걸었던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 젊은 승려들 사이에서는 불교정화중흥운동의 바람이 일고 일었고 그 중흥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나는 한국 정통불교수호의 기치를 들고 피곤이 풀릴 새도 없이 이내 다시 여행길에 올랐었다. 지리산의 골짜기를 비롯해서 충정도, 전라도, 강원도의 심산에 자리한 간원을 찾았다. 간원이라고 해야 초라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지만 그런 곳까지 다니면서 한국불교의 앞날을 위해 일할 동지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그 때의 고통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정도이다.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았지만 그 때에는 승려들이 무일푼으로 떠난 다느 것이 거의 불문율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동전한푼 지니지 않고 떠났던 나는 두세달 동안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고 때로는 머슴들이 거처하는 방에서 그들의 온갖 익살과 놀림에 태연히 대꾸해 가며 새우잠을 자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중에는 어떻게나 초라한 몰골로 변해 있었던지 가는 것마다 마을의 아이들이 뒤따라 오며 누더기 중이라고 놀려대었다. 사실 그 무렵 나는 서울에서도 (누어기수좌)라고 별명이나 있었다. 그토록 헌옷에 맨발로 다녔던 것이다.

나의 그 고생은 조그만 결실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얼마 후에 50여명의 젊은 승려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고,그들은 모두 불교정화를 부르짖었다. 이 모임에 세칭 전국학인 대회라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데도 그 모임은 의의로서는 그후의 어떤 모임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모임은 한국불교정화운동의 시초인 동시에 나의 염원인 정화불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젊은이들의 중흥운동도 일경의 탄압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체하여야 하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그 때 그들에게 모임이란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고, 더욱이나 불교인들의 모임이란 항일의 주체세력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하여 학인들의 중흥운동의 기치는 소리없이 내려지고, 곳곳에서 모였던 젊은이들은 다시 뿔뿔이 산간으로 흩어져 버렸었다. 한국 불교를 위해서는 불행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 개인을 위해서는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때까지 불사의 뒤치다꺼리만을 도맡아 하고 있었고, 또 주의에서도 으레 그러려니 여기고 있었던 터에 일경들의 그 탄압과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를 위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운동이 깨어지고 또 강원수업도 마치게 되자 표연히 길을 떠나 만공스님이 계시는 충남예산 정혜사로 내려갔다. 정혜사에 도착하던 날 은 섣달 그믐이었다. 그날밤 나는 만공스님과 함께 기울져가는 한국불교를 중심으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 받았고, 그날밤 스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이후 의 내 발걸음에 커다란 지침이 되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도 나는 사찰 일을 돌보야 했다. 어쩌면 나는 속인들이 말하는 일복이라는 것을 타고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 승복을 입은 일본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내 일에 몰려 지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 절에서 3년을 보내고 나니 더 이상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스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선방으로 들어갔다. 낯 씻는 일, 변소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에 몸을 맡기었다 나는 문앞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고, 목이 마르고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고,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갔다. 점점 무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서 앉아 있어도 앉은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가 않았다. 한숟갈의 밥, 하나의 정좌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였다.

사람들이 뒤에 들려주어서 안 사실이지만 그 때 내 얼굴은 열에 달아올라 새빨게지고 신경이 타서 나중에는 청동색으로 변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저러다 죽지나 않을까하고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진하는 길에서의 되돌림이란 그 자신만이 하지 않아면 안되는 법이다. 타인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성원하고 기원했을 뿐 제지하 지는 못한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나는 점점 더 무를 확대시켜 가고 있었다. 창을 두들기는 빗소리와 풍경을 울리는 소리, 그리고 나뭇잎이 구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밤이 어둠이 밀리고 밀린 끝에 아침이 오고, 창살이 햇빛을 가득 받아 타올랐다가 꺼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선방의 수좌들 사이에서는 내가 견성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만공스님께서도 견성했다는 인가를 해주시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 속에 너무 많은 미혹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느겼었다. 그랬으므로 그 인가를 받을 수 없었다. 겸손히 사양하고 오대산의 적멸궁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퇴락해 가는 불법의 중흥과 세계의 평화와 안락을 위해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다만 겸손으로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견성을 한 승려들은 게송을 지어 그의 해탈의 깊이르 나타내는 법인데 나는 그것을 짓지 않았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그 미혹을 쫓아내려고 버둥거렸었다. 백일기도를 하러 오대산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그 미혹의 그림자를 쫓기 위한 구실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날 나로부터 게송을 지어 받고 싶다고 한 동료가 어떻게나 심하게 조르는지 그것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옛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淸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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