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회고록을 쓸 때에 다같이 지나가 버린 일에 대해서라도 어떤 종류의 기쁨과 따사로움을 가지고 쓰게 되는 부분이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비장의 가보와 같이, 내밀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부분이 그의 일생에 없다면 그 화고록을 기술하는 사람의 심정은 얼마나 삭막한 잿빛의 것이랴.
다행히도 나에게 그 생기에 차고 4월의 벚꽂과 같이 화사한 부분이 있다. 내가 누렸던 짧은 기간의 여우별과 같았던 사랑은 지금은 젊은이들에게는 웃음거리밖에 되니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때 우리들의 사랑과 오늘의 사랑 사이에는 너무도 심한 격차가 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많은 시간과 장소가 있고 서로의 대화가 있으며 사랑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함으로써 그것을 보다 확실하게 그들의 것으로 누리는데, 그때의 우리들은 그저 보고, 웃고 그리고 헤어졌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월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든가 (못잊어 생각이 나갰지요.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식이었다. 그런 유약하는 식물성적인 사랑이었으면서도 그것은 그들의 개인과 비장의 것이 되지 못하고 소문 속에 한번 끼이기만 하면 삽시간에 소문은 퍼져 마을 전체의 것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생각이난다. 어느 보리밭에, 어느 뚝가에 사랑의 표적이 났다고 하면 아이들은 모두 그곳으로 줄달음쳤었다. 보리닢이 얼마나 쓰러졌는가, 그 어떤 흔적이 남겨져 있었는가를 눈을 부릅뜨고 살폈다. 만약에 그 사랑의 자리에 붉은 핏자국이라든가 손수건이라도 발견하는 날이면 그것은 마을에 생기를 부어주고, 그리고 젊은이들은 그것에서 얻은 환상에 잠겨 마치 그들 자신이 그 주인공이었던 듯한 부끄러움마저 가지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하기 몹시도 어렵고 불편한 시대가 우리들이 살아온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서 사랑을 가졌다는 기쁨을 느낄 수 없이 나는 사바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왔지만 이렇게 기술하고 있는 순간에는 잔잔한 기쁨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 그도 지금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랑하였던 그때에는 그녀는 젊었고 얼굴에 싱싱한 푸르름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는 나와 한반이었던 황한성의 동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성을 따라 종종 그의 집에 들었고 자연히 우리는 함께 앉아서 소근거릴 기회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의사표현이 아니라 누구는 오늘 교정의 포플라 아래서 상투를 잘랐는데, 상투가 땅에 떨어지자 울음이 터뜨렸으며 그의 아버지는 맨머리로 온 아들을 보고 조상을 뵐 면목이 없다고 문을 닫고 들어앉았으며, 오늘 일본 여자가 게다를 신고 재판소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오늘 뒷산에서 나팔부는 소리가 들였다는 것 등이었다.
그밖에도 우리는 누가 누구와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의 우리의 두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었다. 그러는 새 우리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사실도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져갔던 듯하다. 어느날 아침 책보를 끼고 사립문을 빠져나가려는 나의 저고리섶을 어머니가 붙잡았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남자나 여자에게 결혼을 해야 할 알맞은 시기가 있다는 것, 네 나이가 마침 결혼을 해야할 시기에 해당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K와의 사이를 염려하시었다. 남자는 여자나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짓은 삼가야 마땅하며 더욱이 혼사는 인륜지대사라 함부로 처신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어머님의 말씀이 있은 후, 3일동안의 여유를 가지고 결혼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나는 뇌리에 떠날 줄 모르고 살아 있는 K 때문만은 아니었다. K를 지극히도 사랑했지만 그녀와 결혼을 하리라는 사실적인 결심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암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님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다. 부모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은 그때의 시절에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더욱이 외아들이었던 나에게는 더욱 더 그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쪽도 자리로 선택하지 못하고 나날을 우물쭈물하다가 열아홉살 되던 섣달 어느 날 나는 조랑말을 타고 언덕을 넘어 나의 신부가 살고 있다는 마을로 향하여 갔다. 그의 집에는 생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 여자를 향하여 큰절을 했다. 그 여자도 허리를 구부리었다. 그것이 모든 설명을 제해버린 나의 결혼식의 전말이 었다. 그와는 전연 딴판인 여자와 결혼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나는 K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보다는 우리들은 보다 훌륭하고 뜻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랬으므로 내가 그때 느끼고 있었던 슬픔이 있었다면 결혼을 함으로써 그 꿈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낙심에서였을 것이다. 한 집안의 장남이며 외아들이라는 사슬이 이 모든 겉보기에는 한결같이 평범하고 일상사의 잡다함으로 가득 찬 생활 속에거 깊게 나를 구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적 가족제도와 사회제도는 장남에게 얼마나 많은 제약과 억압을 주는 것인지를 지금의 젊은이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은 뼈 아프게 느껴야 하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일본으로도 서울로도 가서는 안되었다. 그들은 공부에 열중할 수도 없었다. 그것보다는 그들은 부모 곁에서 조상을 받들고 나가야 했다. 내가 일본유학을 포기하고 진주농업학교를 지망하였던 것도 벗어날 수 없는 이런 사회적 배경이 뒤깔려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나는 농업학교의 원서를 사서 제출했다. 드디어 시험날이 되었다. 나는 시험을 치렀다. 예상한 대로 문제는 아주 쉬었다. 제한된 시간의 반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해답안의 작성을 끝냈다. 그중 수학문제 하나가 틀린 것을 뒤에 발견하고 고쳐 쓰려 했으나 시간이 늦어 쓰지 못한 것 이외에 다른 불비한 점은 전혀 없었다. 나의 합격은 나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나는 나 자신의 합격여부보다는 보통학교 시절에 가장 친했고, K의 오빠이며 황의치씨의 양자인 황한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었을까? 걱정하던 황한성의 이름은 합격자 발표란에 적혀 있었으나 내 이름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놀라움은 나만이 아니고 담임선생도 친구들도 일반이었다.
내가 답안지 작성에 실수를 했거나 미숙한 점이 있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정답을 썼었다. 그런데도 내가 불합격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쓴잔을 마신데는 그럴만한 사건이 개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저 유명한 기미 삼일 만세사건이다. 3년 전의 사건이 그때까지 기억되고 치부되어 진학하는데 영향과 누를 끼치게 될 줄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 것인가.
淸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