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교에 귀의한 이래의 이청담이라면 불교정화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불법은 청정본연을 말하는 것이다. 본래 청정도 주지 않는 것이어늘 하물며, 어찌 부정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정이 있음을 또한 어찌하랴.
모든 종교사는 종교본연의 근본을 좀먹는 비본질적 요소와 대결하여 싸우는 투쟁의 역사이다. 비본질적 요소는 두선 교단의 토인인계율에 도전하다 이 도전을 받고 계율의 순수를 고수하려는 정화운동은 일어난다.
근대 한국 불교의 정화운동이란 불교와 불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승단의 정화를 말하는 것이다. 청정하여야 할 승려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을 때, 마땅히 본부 세존께서는 정하신 율법에 따라 대치되는 요소는 제거해야 한다. 이 운동이 바로 근대 한국 불교의 정화이다.
어떻게 보면 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정화와 반정화의 투쟁은 가장 치열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한국불교의 정화문제는 멀리 1920년대로 소급된다.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한 이래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여러 모로 변동이 일어났다. 그중에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승려들이 술,고기,담배를 먹는 특히 대처문제였다. 원칙적으로는 대처하지 않는 것, 이것은 부처님 이후 출가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이다. 글자 그대로 수천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전통이기도 했다. 어쨌든지간에 청정해야 할 불법문중에 훼법분자 대처승이 생겨났으니 근대 한국 불교 승단에서 막행, 막식하여 처자를 거느린 비법승배들이 종권에 등단하고 교계를 혼탁케 한 데서 마침내 호법정화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의 한국침략과 더불어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식민지화정책의 비호아래 파계환법자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교단에서 당당하게 호령하게 됨에 그들의 수효는 순식간에 늘어갔고 이때부터 불교는 타락의 길로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이러는 가운데 적은 비구스님들을 모아 불조 보위책으로 1926년 12월 서울 안국동 선학원을 본거지로 종풍의 중흥을 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불교정화운동의 봉화인 것이다.
1950년 이후 나는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 박가를 찾아 뵙고 불교정화의 동기와 의의를 설명하였다. 그후 대통령은 (처자있는 승려들을 사찰 밖으로 물러나고 한국 고유의 승풍과 불조의 혜명을 잇기 위해 독신승이 사찰을 지키게 하라)는 담화문운 발표했다. 그것이 정화추진의 일대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드디어 1954년 6월 20일 서울 선학원에서는 원토비구들이 모여 교단정화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8월 20일에는 전국 비구승대회를 소집, 정화운동의 기본방침이 결정되었다. 교계 신도의 호응은 물론 사회 일반 여론도 사회정화 민족종교부흥의 관점에서 전폭적인 성원을 보내주었다. 이 때 나는 도총섭(총무원장)에 선출되었고 정화 완수를 위한 순교단을 조직하였다. 2월 5일에는 정화의 실천의 제일보로 태고사에 합법적으로 입주, 조계사라고 했다.
이때부터 정화운동은 격심한 호법투쟁양상을 띠기 시작하였고 쌍방의 충돌이 빈발하여 승가의 본의가 아닌 유혈충돌까지 발생하였으나, 한편 전국 각처에서 비구승들은 축출되고 폭행을 당했으니 충돌을 비구스님들께서 정법에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낳게 하여 마침내 정화완수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1955년 6월 10일 법당에서 철야정진 단식기도를 하고 있는데 비법배(대처승)3백여명이 새벽의 기습을 감행하였다. 기도 삼매중의 법당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하고 2인 3인조로 닥치는 대로 치고 받으면서 기도 중인 대중스님을 끌어내어 내동댕이를 치곤 하였다. 천인공노할 참경은 그저 입을 다물고 펜을 놓을 따름이다. 나는 이때 다친 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몇 년 동안이나 고생하다가 부처님의 가화를 얻어 회복하긴 했다. 그러나 우리 비구승 3백 50명은 끝끝내 굴하지 않아 순교적인 정진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피나는 정화불사는 전국 방방곡곡에 진행되어 1968년 8월 13일 총무원장으로 정화운동의 기반은 더욱 굳히어 전국 사찰의 90퍼센트 이상이 우리 정화교단 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1962년 4월 10일 이른바 통일종단의 형성이 이루어져 이로써 정화불사는 일단락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통합종단 내에서 일어난 몇 가지 불상사와 각 사찰에서 자행됐던 불교신앙과는 거리가 먼 미신행위는 쉽사리 근절되지를 아니했다. 1966년 대학불교조계종 제 2대 종정에 추대된 나는 불교 근대화작업을 추진하던 중 정법현양을 위한 나의 염원은 더욱 불타고 있었다. 무사안일주의 문중 파벌주의 화합의 미명 아래 고개를 쳐드는 대처승 무리들의 현대사회에 대한 무관심이 모든 풍조는 나의 염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고 그렇게 16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투쟁해온 나의 정화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가지 고민 끝에 1969년 7월 5일 대한불교죠계종 중앙종교회에 마지막으로 근대화를 위한 유신 재건안을 내놓았다. 최후로 정화이념을 실천할 기회를 다시 한번 얻어보자는 생각에서 였다. 화동이란 명목 아래 종회 의원 자격을 얻은 대처승들과 아합하던 무능 비구승들은 나의 유신재건안을 여지없이 묵살시키고 현대한국 불교 조계종 내에서 그토록 애타게 염원하던 불교근대화작업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를 나 스스로의 잘못으로 깨닫고 뼈저린 참회의 마음으로 종단을 떠나 불교 근대화, 정화불사의 기치를 또다시 들게 됨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는 없었다.
淸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