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사의 밤숲을 거닐면서

깊은 밤 승려들은 바람과 적요를 만난다.

그것들은 길을 건너고 나무숲을 헤치면서 풍경소가 뎅그렁뎅그렁 울리는 산간의 사원을 찾아온다. 승려들은 바람 소리를 본다. 바람은 기체이다. 그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데도 본다고 하는 것 은 보는 것이 눈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하늘이 푸른 것을 보고 노을의 아름다움을 보고 적요의 쓸쓸함을 보고 그것들 곳에 내재한 만상의 이치를 본다. 승려들이, 아니 사유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을 이러한 밤으로 택하는 이유는 밤에 가장 조용하게 그 모든 것들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의 밤을 나는 찾아 갔던가! 검은 이파리 사이에서, 냇물가에서 의문들은 머리를 들고 일어서고, 그것들은 마치 도금한 놋그릇돌처럼 반짝이면서 나의 가슴에 와 부딪친다. 무수한 파장이 일어난다. 물결은 왜 아래로 흘러가며, 나뭇잎은 왜 한없이 석석이는 것일까? 왜 나는 그 소리들은 따라 걷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알자는 것일까? 안다는 것이란 또 무엇일까?

물결이 흐르는 것은 땅이 경사졌기 때문에 흐르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에 밀리기 때문에 흔들릴 것이다. 마음이 있어서 흐르고, 흔들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밤에 밖에 나와 보면 그런 평면적인 대답이 무미건조하고 그 너머에 그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같다. 그것이 무엇일까? 조주스님은 이럴 때 무어라고 대답하셨을까? 여전히 무라고 대답하셨을 까?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스님이 무라고 대답하셨을 때에는 다만 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무라는 말로 인해서 얻어질, 보다 크고 절대한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뒷날 대승들은 그것이 일체를 열어주는 열쇠라고 했고, 일체를 쓸어버리는 쇠빗자루라고도 했고, 나귀를 매어 두는 말뚝이라고 했다. 여기에 모든 정진하는 승려들의 위함이 따르는 법이다. 조주스님의 무는 각자의 길로서 보는 수밖에 없다.

조주스님의 부의 그 의지들은 조주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할지언정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제승들은 조주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할지언정 무자에 떨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무자화두에는 좋은 비유가 하나 있으니 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보여주리라. 옛날 양귀비가 궁성으로 갔을 때 그는 그의 애인을 궁성 아랫 집에 살게 하고 매일 (소옥아 소옥아)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시종의 이름을 불러댔었다. 그렇게라도 하여 그의 음성을 애인에게 들려주는 의도에서였다. 다시 말하면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애인에게 전달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와 같이 무자화두는 무자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자를 통해서 얻어질 그 무엇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째서 조주스님은 무라고 했는가. 그리고 뒷날의 대승들은 어째서 그것을 일체 명근을 끊어버리는 칼날이라고 했는가를 의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들은 밀고 나아가면 그 끝에서 잡상들이 피어오를 것이다. 그 잡상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을 버려둬야 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의문 하나만 을 간절히 일으키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의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주면서 오래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대들은 견성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견성이란 무었인가? 자기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본성이란 그러면 또 무엇인가?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자기의 본체, 즉 만물의 근원에 자리한 불이다. 어떤 처사는 그 불을 구하여 일생을 보낸 끝에 어느 한 대승을 만나 이야기했었다. (이대로 시주만을 얻어먹고 도를 얻지 못하면 죽어서 소밖에 될 것이 있겠소?) 이 때 대승의 말, (소가 되어라도 무비공만 되면 좋지) 무비공이라는 그 말에 순간 처사는 대오하고 끓어 엎드리었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무비공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있어지는 세계였다.

그러나 그 대사와 처사가 간 지 수백년이 지난 뒤의 한 작은 암자에서 전가선사는 의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무비공이라는 말에는 없다라는 허물이 있고 미각시아가라는 말엔 깨닫다라는 허물이 있으니 그런 허물을 가지고 어찌 제 9암마리 식을 건너갈 수 있을끼? 건너간다라는 말엔 건너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구문상으로 불가피하게 존재하여야 하는 것 이지만 해탈이 있어서는 그것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해탈을 그르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수한 승려들은 이렇게 의문에 의문을 넘어간다. 가령 나만 하더라도 일찍이 견성의 미미한 그림자를 보았을 때 세상에 내어던진 소리,

만상의 나무들이 누렇게 시드는데
벼랑 위에 오직 한 나무 싱싱하게
푸르러 있더라

오늘 나는 도선사의 나무숲을 헤치고 가면서 그 계송에 의문을 던진다. 어떻게 잎사귀가 시들고 홀로 푸르다는 흔적을 남기고 지혜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아직도 미망의 그림자를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마치 바람처럼 마치 달빛처럼,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 있고, 어떠한 그릇에도, 어떠한 시간에도 자유자재로 담길 수 있는 것이 대오가 아닐까? 그러한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는 시늉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그럴 것이다. 그래서 효봉종사꼐서는 입멸하시면서 수많은 불자들이 송을 바랐을 때,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것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다면
달빛이 천강에 비추리

라고 했던 것이다. 효봉이 모든 것을 군더더기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속에서 말로 표현된 모든 것이 군더더기란 뜻보다는 그 분의 생애에서 모든 것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법기암토굴에서의 결사적인 정진 끝에 오도한 이후로 그 분은 한국불교의 통합과 불교의 전파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그리하여 그 분은 63년 4월 11일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개인의 길에서 종정이라든가 전파는 저추장스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길에서는 언제난 정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함께 세상을 태어났다는 인연 때문에 사해대중들을 깨우치치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아니다.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불교는 사해대중의 구제에 더 큰 뜻이 있을지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득도를 한 다음 우베라촌에서 내려왔고 의상 또한 고국 신라로 돌아왔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그들이 왜 내려왔는가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누구에게로 돌아왔는가? 그의 나라로, 그의 형제들의 곁으로 온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떤 사실 앞에서도 우선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한국인이다. 많은 한국인의 구제가 오늘의 한국 불교의 명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기 애국론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애국자를 배출한다거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며 또 대중들을 천당으로 인도하는 데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죄악과 번뇌와 고통 속에 잠긴 인간을 참 인간이게 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죄악과 번뇌를 버리고 진정한 안락을 누리게 하도록 하는 것, 지혜롭게 하는 것, 자비로운 협조자이게 하는 것, 그것이 불교의 참 뜻인 것이다. 그것을 원효는 오직 (자리와 타리를 염원하고 보리, 즉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는 인간의 모든 지식이 필요하다. 아니 오히려 고다마부다가 그러했듯이 그러한 모든 지식은 궁극적인 이해의 진리와 체현에 필수불가결의 기초지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불교의 대명제 앞에서 한국불교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매일의 신문들이 활자화하고 있듯이 내분, 탈퇴, 불만, 파문, 반대 타락의 일변도가 아닌가? 이러한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는 책임이 다른 파에 있고 나에게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이유가 있다면 그들에게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양자에게 다같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따진다거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불교가 대중을 구제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싶을 뿐이다. 이것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나의 (유신 재거론)이라는 것이 되겠지만 나는 굳이 유신이라는 말로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그 말은 너무나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기 때문이다.

淸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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