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도 칭찬도 없는 자리

요사이 구두선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 절에서 쓰는 문자가 하나씩 하나씩 사회에 나간 말입니다.

그것을 입으로 배운 사람이지 참말로 앉아서 정진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을 구두선이라 한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거짓말하는 것, 책임없는 말, 실천없는 말을 뜻하는데 그러나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집에 불이 났는데 집안에서 장난에 정신이 빠진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아이들이 평소에 좋아하던 양수레 사슴 수레 소수레가 밖에 있으니 나와서 가지고 놀라고 하여 아이들을 불덩이의 재난 일보 직전에서 무사히 구출해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자식들을 살리려고 부모가 거짓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보다 더한 참말입니다. 부처님이 49년 동안 고구정녕으로 말씀하신 8만 4천의 법문도 사실은 중생들의 꿈을 깨워주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실상 자리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계신 박고봉 스님이라고 공부를 잘 하는 스님인데 송만공스님 제자입니다. 한 번은 고봉스님이 만공스님 계시는 토골 을 내려다보고 (도둑놈 만공아 송 만공아. 네가 견성을 했어? 이 도독놈아. 견성을 점 내놔 봐라.)이렇게 욕을 한나절을 퍼부어 놓고는 절 큰방에 내려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절에 참나무 절굿대가 큰 게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찧을 수도 없는 것인데 만공스님은 이것을 들고 (이놈을 이것으로 쳐 없앨 수밖에 없다. 욕을 해도 분수가 있지)하며 이 몽둥이를 들고 찾아 다닙니다. 만공스님의 힘이 장사입니다. 밥 푸는 놋주걱, 놋그릇 두꺼운 것을 종 만든다고 많이 모았는데, 만공스님 혼자 앉아서 종이 포개듯이 접어서 갭니다.

우리가 평소에 만공스님 힘쓰는 것을 이때 처음 봤습니다. 만공스님이 힘이 장사인 줄을 대개 알고 있는 것은 김 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왼팔은 만공스님이 이기고 오른팔은 비기어 승부가 없을 정도입니다. 김 좌진장군과 잘 알아서 가끔 놀러오고 그랬는데 뚝심으로 우뚝 쓰는 힘은 만공 스님의 힘이 훨씬 세빈다. 그것은 생각없이 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 스님 하품하는 소리가 이십리 밖에서 들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만공 스님이 (이 놈의 자식, 세상에 망신을 줘도 분수가 있지 이렇게 까지 할 수가 있느냐. 비구니 비구가 다 있는 데서 이게 무슨 짓이냐. 용서할 수 없다. 이놈이 여기 있느냐. 어서 큰 방문을 열어라)호통을 칩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문을 활짝 열고 쓱 내다보면서 (스님 왜 그러십니까.) 하고 태연하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만공 스님은 (허허)하며 돌아서 가면서 바윗돌을 번개처럼 때리는데 바윗돌이 잘라져서 몇 동강이 나 버렸습니다.

(스님 왜 이러십니까.)하는 소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배웠으니 알 수 있는 소리입니다만 송만공이라는 존재가 뭐 있느냐는 말입니다. 존재가 아닌 존재인데 그것은 욕을 할 수 없는 것은 더 우스운 일아 아니냐는 뜻입니다. 만일 성내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 성불하려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렇지만 깨쳤어도 한편은 역시 중생이 남아 있고 한편은 근본자리를 부처님과 같이 깨쳐 놨고 아직 수치가 덜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자성을 깨쳐서 자기 본래의 면목을 보면 그중에 공부를 옳게 하거나 약갼 잘못하거나 시장을 돌아다닐 때도 그것을 보고, 산중에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전부 그겁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돌아앉을 때도 그것을 보고 그런 경지인데 만공스님 고봉스님 두 분이 서로 충고한 것입니다.

당나라 당시 조주스님이라고 굉장한 도인이 있었는데, 그분이 계시던 절에서 십리 밖 산밑에 한 노인이 호떡장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스님네들이 조주스님을 한정없이 찾아오는데 처음 오는 사람은 그 노인이 있는 곳에 갈림길이 있어서 자연히 길을 묻게 됩니다. 그러면 그 노인은 절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갈은 가리켜 줍니다. 그 행인은 바로 가는 줄 알고 한참 올라가면 그 노인이 스님 스님 불러 놓고는 아, 그리 가면 절이 없으니 이리 가라고 합니다.

가래서 되돌아서서 내려와서는 다시 올라가서 절에 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 두 사람이 아니고 열 사람 백 사람이 그렇게 당하고 보니 (늙은이가 처음부터 바로 길을 가리켜 주지 않고 꼭 한 번 저쪽으로 잘못 가리켜 놓고는 다시 불러서 가리켜 주고 스님네들를 놀린다.)고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조주 스님이 당장 주장자를 들고 오늘 이 자를 타살해야겠다. 공부하는 스님네 한 시간이 바쁜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니 당장 때려 죽여서 지옥업보를 적게 받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내려가십니다. 그러니 스님네들도 뒤에 멀찌기 떨어져서 어떻게 하나 하고 따라갑니다. 조주스님은 일부러 다른 데서 처음 오는 사람처럼 노인 있는 데로 옵니다. 노인 한테 길을 물어 보니까. 역시 다른 길을 가리켜 줍니다. 그래 스님들은 저놈의 늙은이 오늘 혼난다고 하면서 어떻게 되는가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조주스님은 그저 고맙다고 하고 그냥 올라 옵니다. 그리고는 절에 와서 앉아 계십니다.

이것이 조주스님이 그 늙은이를 쳐서 타살한 것입니다. 그게 어찌해서 타살인가. 여러분 스스로 한 번 풀어 보십시오. 천 번 만 번 설명한 것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원자가 우주의 궁극체인 줄 알았는데 요새는 또 더욱 분석이 되서 전자는 중성자니 양성자니 하는 것을 밝혔고 또 그게 마지막인 줄 알고 이렇게 생각했더니 더 근본이 되는 에네르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으로 알지 사실은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세밀한 그것도 물질은 물질이겠는데 이놈이 때로는 물질로 전자로 양자로 중성자고 보이고 어떤 때는 그게 또 그것도 저것도 아닌 에네르기 존재로 보인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물질도 아니고 전자도 아니고 에네르기 아닙니다. 이래도 보이고 저래도 보이고 하니까 마치 종소리가 깡깡도 땡땡도 아니라고 하면 사실 종소리의 실상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과 한 가지입니다. 그러니 아인쉬타인이 현상계가 아니고 먼지가 먼지가 먼지가 아닌 이 이치까지 충고를 해 준 턱입니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참 진리인 실상과 현상계는 틀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이름을 듣고 어떤 개념을 가졌은을 때 그 개념과 딱 맞는 사실이나 똑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듣고 그 내용의 설명을 듣고 짐작해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과 사실과는 맞춰 보면 전혀 반대도 있고 또 비슷한 것도 있지만 딱 맞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령 비행기의 경우에도 세밀한 설계를 해 가지고 그대로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조립해서 내어 놓는 그 시간부터 숨쉬는 시간부터 설계와는 달리 부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또 만드는 그 도중에 설계와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모든 것은 찰나도 쉬지 않고 변멸하는 것이므로 완성품의 반만 만들었다 해도 실제의 설계와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천 시간쯤 비행해도 모르지만 엄밀하게 따져서 물질적으로는 변동은 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설계에 맞은 건축도 제대로 할 수 없는거고 현상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따지는 분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불자를 안 들어 보고 하는 소리밖에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진 게 금강경이니 글자의 뜻은 전부 확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삼천대천세계도 세계가 사바세계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는 과학적이요 철학적이요 동시에 완전한 종교입니다. 과학이 아닌 과학, 종교가 아닌 종교, 초과학, 초종교인 동시에 초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구나 아무것도 없는 걸 가지고 몇억만 배 했다면 말이 안 되고 그게 몇 배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없는 걸 없는 것으로 보는 도수가 있고, 그와 동시에 사실은 아무 도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뵈는 것이니 도수가 있다고 하면 마지막이고 없다고 하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완전히 이 해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지언정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지언정 이런 원리를 떠나서 허황되게 설명한 것은 한 자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미진 전자같은 요소들이 뭉쳐서 태양이니 지구덩이니 화성이니 목성이니 금성이니 하는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세계가 아닙니다. 그게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있는 것 같은 거지 그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세계가 말하고 중생이라 말 했지만 그게 세계가 중생이 아니며, 있다면 모두 꿈같이 있는 것입니다.

파초 줄기 속에 알맹이가 있는 지 자꾸 벗겨 버면 껍데기 뿐이고 알맹이는 없습니다. 이처럼 현상계 전체를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 아무것도 없는 데 도달합니다. 그래서 허공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전자 이전에 에네르기 이전에 허공이 변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됩니다. 역시 광명이 멀리 가서 소모되고 없는 데로 돌아가는 걸 보니 역시 물질이 생긴 것도 없는 데서 생겨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하는 것은 과학자들도 인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주의 구성이 아무것도 아닌 허공인데 허공이 우주나 전자 산소 수소로 보일 뿐 참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공즉시색 그러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물질, 곧 색이요, 지금 있는 것이 곧 없는 거라는 그 말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오천여 자나 되는 요점을 이백칠십 자로 종합해서 기묘하게 되어 있는데 이 반야심경의 첫 구절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즉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니 진공에 돌아가서 소모되어 있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이고 있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꿈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 꿈을 일으켜 놨기 때문에 있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손이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데 괜히 쓸데 없이 여기 초가 있고 손도 있고 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초가 부러지기 전에는 손이 통과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손에 초가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생긴 티끌로 쪼개기 전에 물체인 채 그대로 지구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그러므로 미진 자체가 미진이 아니라는 게 어디까지나 물질의 근본을 얘기하는 말이면서 그것이 합해서 구성된 지구라는 이 현상계 모든 물질도 그대로 곧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렇고 동시에 바다 물 보배다하는 현상계의 존재가 그대로 역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걸 세계라 하고 미진이라고 한 것이므로 곧 미진이 아니고 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걸 무엇 때문에 문제로 삼았느냐 하면 (이게 지구다, 요거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저거는 중공이다.)그런 생각 이런 착각을 갖고 쓸데없는 객관에 대한 욕심을 가지게 하는 데서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천지가 있는거고 만일 천지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존재라면 천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천지는 두드려 부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 (나)를 도외시하고 공자니 맹자니 노자니 예수니 하는 분들이 객관이나 신에게 자신을 예속시켜서 구속되고 얽히고 만들고 그랬지만, 인류의 오천 년 문화의 사상은 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고 전재하는 것이데 이 (나)를 밝히지 않고 항상 객관에서 진리를 구하려 한 데서 잘못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교는 이 (나)의 실제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현인이나 성인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보살의 근처도 못가는 정도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틀린 겁니다. 모두가 다 마음의 그림자고 꿈이고 환으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한다는 말은 미진이라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고 무엇이든지 이름을 붙여 주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크다고 하면 안크다는 말이고 작다고 하면 크다는 말이고 이렇 게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상대성 원리를 연구한다고 하지만 아인쉬타인은 수박 겉 핥기로 조금 애기하려고 하다 갔지 불교에서 말하는 근원을 철두철미하게 알맹이까지는 미처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을 탁 놓아버리고 세상을 살면 수월합니다. 돈 모으는 것도 참말로 모으려는 욕심으로 모으는 게 아니고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하는 것이므로 남 주는데도 아무 힘 안 들이고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수물 삼자가 청정한 것입니다. 누가 내 눈이 필요하다면 눈도 빼주고 코도 베어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자는 것입니다. 삼천대천 세계의 먼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 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아 먹혀서 양식도 되어 주고 하면 그 복이 한량없을 겁니다.

그런데 재산이나 칠보를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도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평생 두평생도 아닌 한량 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많은 몸을 남에게 보시했다면 그 공덕이 한없이 많 겠지만 그러나 앞에서 조주스님이 길을 잘못 가리켜 주는 노인을 타살하겠다고 내려가서 별일없이 고맙다고만 하고 돌아온 소식, 만공스님이 절구공으로 고봉 스님을 때려 죽인다고 하다가 (스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하는 한 마디에 박장 대소하고 그만 둔 그 소식을 체득하지 못하고서는 참으로 큰 공덕을 지을 수는 없으며 법다웁게 금강반야의 도리를 받아 지닐 수도 없는 것입니다.
淸潭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