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다 허망한데 그중에 허망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뿐이다.
그것을 꼭 알아야겠다 하면 그것은 이미 견성에 연결되는 생각이다. 남이 다 성불하고 맨 나중에 성불헤애 한다. 성불해야 안심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어디로 가나 고통이다. 천당을 가나 극락을 가는 높은 것 낮은 것 다 있다.
이 마음을 깨쳐놓고 나면 나 보다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다.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고 그러니 평등의 세게이다. 거기는 시기질투도 없고 사람 만나면 서로 부처니까 서로 반갑고 치하를 하고 지낸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실다운 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객관을 다 떨어버리면 그처럼 여래를 보다고 한 것이다.
부처가 중생이요, 중생이 부처니 말이다.
불법과 세간법을 가릴 것 없이 일체소견과 주의주장은 모조리 버릴 것이오. 그러므로 저 부처님 당시의 유마거사는 그 방안에 온갖 물건을 없애버리고 다만 침대 하나만 두고 항상 일체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병을 앓으며 드러누워 있다. 우리들이 부처님은 과거사를 다 아신다고 신통이라고 하지만 성불하고 보면 사실은 본래 그런 것 뿐이고 모든 착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어서 종소리가 깡깡이다 땡땡이다 하고 듣는 그런 업을 해탈했기 때문에 과거를 과거인 줄 알고 봤던 것인데 이제 보니 항상 목전지사다.
비유하면 어린아이들에게 하나에 둘울 더하면 몇 개냐고 물으면, 하나, 둘 꼽아 보고서야 셋인 줄 알고 어른들도 좀 복잡한 계산은 수학적인 지식을 빌어서 알게되지만 부처님은 항상 나타나 있으니까 연구하고 셈을해서 아시는 것이 아니다. 일체를 분별하지 않고 즉각으로 아는 무분별지다.
성불해야 하겠다. 생사를 해탈해야 하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무상하다고 하지만 이것은 모두 다 쓸데없는 생각일 따름이다.부처가 된다는 생각도 없어지고, 그것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없어져서 온갖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들어가면 성품이 이렇구나, 내가 견성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누구나 한 번 날 수 있다. 이럴 때 아차!하고 곧 그 생각을 돌려서 저절로 끊을 줄 알아야 한다.
이렇구나!하는 생각도 망상이기 때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 다 버리고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객관대상, 곧 산보고 높은 줄 알듯 이 객관의 사물을 아는 것이라, 제가 저를 알 때는 아는 걸로 아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객관세계를 보고 잘못 안 지식을 정리해 버리는 것이므로 아무 생각없고 아무 허물 없는 알 줄 아는 마음만 남아있다. 그렇게 되면 알았다는 생각도 저절로 없어진다.
부처님께서는 무분별지로 분별없이 아시고 과거사도 미래사도 분별없이 아시고 중생을 제도하시는 것도 분별없이 제도하셨다.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견성하는 그날부터 종일설이 미진설로 하루종일 말을 해도 말한 것이 아니다. 견상을 하고 나면 무슨 색안경을 끼고 어떤 조건으로 무엇을 하지 않고 다만 무심한 마음으로 무심중에서 말을 하고 듣고 하므로 마치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같다. 그래서 둘이다. 셋이다 하는 것도 앞에 나타나니까 무심히 알지 우리 모양으로 어떤 선입주견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다.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추는 게 아니라 일체동작을 우리와 같이 하는 것은 움직임이 아닌 때문이다.
꿈속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꿈밖에 가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전혀 거짓말이듯이 사실로 가도 간것이 아니고 와도 온것이 아니고 가도 오도 안했다고 해도 가도오도 안한 것도 아니다.부처님께서 생사의 큰 꿈을 완전히 깨우게 하는 8만4천 가지 방법으로 지도하는 그 제일 요긴한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문제로서의 문제가 아닌 문제가 아닌 문제이기 때문에 깨닫기 이전의 문제도 아니며 또한 깨달은 이후의 문제도 아니다. 왜냐하면 깨닫기 이전은 어두운 중생들 의 생사 꿈이요, 깨달은 뒤라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의 꿈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과연 이 꿈을 어디서 깨야 깨는 것일까? 생시도 이놈이요, 잠시 들어도 이놈이요, 꿈에도 이놈이다. 태중에서도 이놈이요, 배 밖에 나와서도 이놈이요, 늙어서도 이놈이요, 병들어도 이놈이요, 죽는 때에도 이놈이요, 억만집 이후에도 이놈이요, 소나 개로 태어나도 이놈이요, 지옥을 가도 이놈이요, 천당극락을 가도 이놈이요, 억만겁 이전에도 역시 이놈이었다. 이 천지에 이놈만은 어디에 빠져 있어도 물 한방울이 묻거나 젖지 아니한다.
진실하고 깨끗하고 자유자재한 변하지 아니하는 실상 자리로서 사고방식이 미치 지 못한다. 어느 때에는 중생도 되었다가 홀연히 부쳐도 된다. 그러나 또한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 따라서 생사도 열반도 보리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인가? 이놈! 잠을 자다가 잠이 아닌 꿈으로 나갔으니 잠도 아니고 꿈도 채 아닌 그 순간은 면목이 무엇일까? 꿈에서 깨어 생시로 나가니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 그 즈음에는 무슨 상태일까? 이놈이 자유 천지에서 뛰노는 법계의 주인공이다. 이놈이 중생의 생사 꿈도 이루고 부처의 열반 꿈도 이루는 것이다.
무실무허한 것도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시는 것은 범부가 이 마음 자리 말하는 이것이 불생불멸의 존재구나 하는 원리를 의지해서 그걸 한번 깨달아봐야겠다고 확실히 인식이 돼서 하나부터 열까지 목숨을 걸고 할 일이 이것뿐이라고 마음 속에 깊이 작정이 되면 이것이 범부의 발심이다.
그렇게 하다가 정진해서 계행을 지키고 만행을 닦아 점점 깊어져서 아공, 법공, 구공을 초월해서 뭐라고 이름지을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이르면 그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깨달았다는 것은 이 마음자리를 알아낸 것을 말하는 것이니, 육도만행을 닦는 형식과 하등의 상관도 없다. 육도만행이라는 법은 다 이 범부 중생들을 불법으로 인도해 들어오게 하는 방편이 아닌가. 가령 무량겁을 닦아서 보리진여해탈실 제법심을 얻어 바로 십지에 올라서서 사과성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다 이것은 성불해 가는 도중의 일이므로 불심인 이 마음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부처님의 무심경계에서는 채용이 둘이 아니므로 생각이 움직여도 무심히 움직인 것이어서 뭉직인 게 아니다. 마치 물이 일어나고 꺼지고 해도 물의 본 성질에는 아무 변동이 없듯이 이 무심히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채용이 둘이 아닌 구경의 자리다. 이 자리는 부처님뿐 아니라 중생들이 제가 몰라서 그렇지 중생들 자신도 본래는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중생들이 망념, 착각 때문에 모든 것이 마음대로 안되지만 사실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내가 마음대로 안되도록 해놓은 것이므로 결국은 마음대로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한쪽 신통은 ㅇ은 셈이다. 이렇게 한쪽 신통만을 고집하다 도리어 구속당하는 중생의 허물을 벗어나는 비밀방법은 오직 한 길 무심뿐이니 인간은 모든 생각 비울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 전체를 쓰지 못하고 한 쪽 신통만을 고집해서 도리어 구속을 당하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별달리 특별한 보리심을 일으켜 가지고 불법을 배워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대 뜻대로 하라. 그러한 별다른 보리심을 가지고는 무량 백천먼겁을 닦더러도 다만 보신불이나 화신불은 될지언정 그 본래 마음자리인 천진불과는 아무런 교섭도 없는 것이다.
모든 큰 보살들의 거룩산 일체공덕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이 마음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깨닫기만 하면 곧 이마음이 부처인 것을 안다. 그런데 근래에 불도를 닦는 사람들이 흔히들 곧 이 마음을 깨치려고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마음 밖인 딴 곳에서 형식적인 가지가지의 방문에 의하여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마음을 닦는 법과는 정반대되는 길이다.모래밭을 한량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 또는 8만4천의 왕들이 밝고 지나거도 저 모래들은 기뻐하지도 아니하며 또한 소, 개, 염소, 똥벌레가 지나가거나 송장이 썩고 있거나 해도 모래알들은 싫어하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의 이 마음도 또한 청정하여 아무 생각도 모양도 없으므로, 범부 중생과 부처가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이니, 다만 곧 이 마음에서 무심할 줄만 알면, 그것이 곧 불법의 궁극인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당장에 무심할 줄 모르면 영겁에도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또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문자에 사로잡혀도 생사를 벗어나가기 어렵다.
한 마디 법을 듣고 즉석에서 무심해 버렸거나 무량겁으로 드나들며 한량없이 닦은 뒤에 비로소 무심하여 부처를 이루는 이거나 그 결과는 다 똑같은 것이다. 무심하면 곧 부처이니 새삼스러이 닦을 것도 없고 깨달아 들어설 곳도 없고, 또한 이 지경에는 사실상 얻은 것도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어서, 진실하며 헛되지 아니한 것이다. 쉽게 깨달았거나 그 도의 공덕에 깊고 얕음의 차별은 없는 것이다. 꿈틀거리는 작은 벌레까지도 저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무량한 보살 대중과 같이 이 마음으로 평등하여 털끌만큼도 다름이 없다.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주의할 바는 세상만사를 다만 보고 듣는 데서 그칠뿐, 옳고 그른 것은 따질 것이 없으며, 또한 그러한 일에 불평만으로 감정을 내지 말 것이며,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을 떠나서 따로 이 마음을 찾으려고도 말 것이며, 보고 듣는 것을 버리며 따로 참되고 좋은 법을 얻으려고 하지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고 듣는 이것만이 곧 참된 본래 마음이라고 생각하여도 어긋나는 것이다. 또한 보고 듣는 것과 떨어져 있는 줄 알아도 잘못이다. 어떠한 주의 주장을 세우지 말며, 무슨 일이든지 살고 죽는 일에까지라도 태연 무심하면 탕탕하여 걸림이 없는 경지에 소요자내하므로, 어떠한 곳일지라도 수도장이 아닌 곳이 없다. 본래부터 청정한 부처인 이 마음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또한 소유물을 간직한 것도 없다.
어느 때든지 도를 깨닫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순간적이어서 1초도 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깨닫고 보면 저 과거에 천만다행으로 드나들며 수행을 한 것이 다 헛된 짓 한 것임을 마침내 일게 된다. 마치 힘센 장사가 자기 머리에 꽂은 구슬을 찾던 일과 같아서, 다만 본래부터 자기 머리에 꽂혀 있던 그 구슬을 발견한 것 뿐이므로, 따로 찾느라고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한 것과 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구슬을 구슬대로 온전했던 그 일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선 꿈 밖에서 꿈을 깨어가지고 (그대로 전체가 꿈 아니라)고 하신 그게 바로 무실무허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짓말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환의 존재이기 때문에 허망하다. 그레서 (내가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한다)고 하셨다.
대개 도를 닦는 데는 그 방법이 한량없으나 그것을 묶어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째는 정신으로써 들어서느 법이요. 둘째는 행동으로써 들어서는 법이다.
먼저 정신으로써 들어서는 방법은 불도를 닦아 이 마음을 깨달아 죽지 아니하고 우주에 자연스런 사람이 되고자 하면 부처님의 말씀과 조사들의 말씀을 자세히 배우고 철저히 들은 다음에 백번 죽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아니할 발심과 정신을 성취하여 부처님과 달마조사에지지 아니할 용기로써 저 청산 깊숙이 들어가서 조용히 앉아 생각하되 보든 중생들이 다같이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며 천지만물에 걸림없이 자유자재한 이 마음 하나만이 자아일 뿐인데, 다만 이 육신을 자아라고 착각하여 일어나는 번뇌망상 때문에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 허망한 일을 버리고 마음의 고장으로 돌아가고자 하거든, 먼저 이 마음을 꽉 막힌 벽과간이 부동하게 하여 앞뒤가 뚝 끊어져서 적멸무위하며 청정 본연한 고장 마음이 되게 해야한다.
여기에는 나도 남도 없으면 범부와 성인도 없나니 이에 굳게 멍추고 어떠한 일을 막론하고 절대로 딴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일은 아예 경전이나 어록 같은 것을 공부에 손해가 되는 것이니, 보지 말고 열심히 정진만 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천진한 본 고장이므로 새삼스러이 이것을 되따지거나 또한 딴 망상을 내지 말고, 그대로만 정진하여 고요하고 깨끗하게 나아가면 이 마음을 크게 깨칠 날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정신 놀음으로 들어서는 방법이다.
다음 행동으로 들어서는 방법은 이른바 네 가지 방법이 있는데, 8만4천 가지 수도방법이 다 이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네 가지 방법이란 원수풀이와 인연 맡겨두기와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과 조작없는 본연의 마음 그대로 살기이다.
첫째, (원수풀이)란 것은, 만일에 공부하는 도인이 어떠한 고생을 당할지라도 스스로 생각하되 내가 과거 무량겁에 이 본연의 마음을 등지고 허망한 업보육신을 가지고 나라고 하여 찬당 지옥으로 생사에 윤회하면서 한량없이 남에게 원수도 맺었을 것이며, 남의 가슴을 태우기도 했을 것이며, 남을 손해보게 하고 남의 생명까지 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금생에는 큰죄를 지은 일이 없지마는 이것은 다 남의 전생에 지은 죄로 인과응보가 닥치는 것이요, 저 하늘이나 인간들이 만드는 일은 아닌 것이니, 달게 받고 추호도 원망하지 말아야 할 것인 줄 알고 진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하시기를 (고생을 당하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이러한 마음 가짐이 근본마음과 합하는 방법이가 때문에, 원수를 만날 때 일수룩 도는 더 높아지고 무량겁에 한량없이 지은 죄를 다 청산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렇게 참으로 발심하여 도를 닦는 사람은 저 천당과 지옥에 걸림이 없어서 자유자재로 때와 곳이 다 수도장이어서 도만 높아지고 본래 마음은 점점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 수행방법을 (원수풀이)라고 한다.
둘째, (인연에 맡겨두기)라는 것은 인간과 만물이 다 뚜렷한 자아의 본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것들은 웬일인지 까닭 모를 이것 저것의 인연들이 뭉쳐 있다가 없어질 뿐이다. 그리하여 더러는 고생도 하다가 잘 살기도 하지마는 저 뜬 구름같이 인간만사가 다 인연들이 서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과보가 닥쳐와서 거들먹거리고 호강을 하지마는 이것도 또한 뜬구름 같아서 복이 다 되고 인연이 흩어져서 거지가 되는 것이 저 인연 그것들이 그러는 것이지만 이 마음은 털끝만큼도 변동이 없는 것이다. 행복에도 놀아나지 아니하면 이것이 마음의 본연면목에 들어맞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 수행방법을 (인연에 맡겨두기)라고 한다.
셋째,(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기)란 것은 일체중생들이 너무도 오랜 동안을 두고 거룩한 이 불멸의 마음이 있는 줄을 모르고 항상 그 허망한 몸뚱이에만 애착해서 여기서 죽어 저곳에 나고 저것에 죽어 여기서 나고 하여 4생6도로 돌아가며 태어나 언제나 그 태어난 곳을 내 고장으로 애착하고 온갖 살림살이를 다 구한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 마음을 깨닫고 저 세속의 허망한 온갖 일을 다 버리고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며 인생의 고장인 이마음으로 돌아와서 다 마음이 청정하며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서 할 일이 없는데 크게 안심하는 것이다.
이 몸이 비록 세상에 붙어 있으나 천지만물이 허망하여 다없는 것이가 때문에 아무 소원할 것도 없으며, 또한 좋아할 일도 없다. 죄와 복은 정함없이 항상 서로 꼬리를 물고 바꿔지는 것이므로 그것을 따르다가는 잠시도 믿고 안심할 도리가 없다. 이러한 삶의 뜻조차 모르면서 한없는 허욕으로 살겠다고 눈코도 뜰새없이 날뛰어야 하니, 마치 물에 빠진 것 같고 불타는 집안에서 헤매는 것과 같다. 이 몸이 원래 고생주머니인 것인데 누가 감히 편하고자 할 것이가. 이 세상이 이러한 곳인 줄 알았기 때문에 온갖 생각을 다 쉬어버리고 아무 것도 구하는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기기를 (구하는 것은 다 고생이니 구하지 아니하면 참 편하리라)고 하셨다. 반드시 그러하다. 세상일에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곧 첫째가는 행복이고 자유이며 해탈인 것으로서 또한 도인의 행세인 것이다.
넷째 (제대로 살기)라는 것은 이 마음이 본래 모든 형상이 아니므로 온 우주에 두루하였나니 청정하여 아무 욕심이 없는 것이므로 불멸하며 자유하며 빛과 힘을 내며 우주를 창조하며 그를 다스린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일체만물의 바탕으로 4행6도에 묻는 때의 일이 없으며, 또한 애착된 일도 없으며 피차가 없기 때문에 이 마음을 법이나 진리이니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에 법에는 깨졌다는 부처의 허물도 없으며, 탐옥의 중생의 때도 없으며 또한 나라는 아만심도 없다)고 하셨다. 지혜있는 사람이 만약 이 마음의 이치를 믿고 알아들었다면 마땅히 본래 마음으로 돌아와서 이 영원한 생명, 자유의 생명이 제대로 살 것이다.
淸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