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의 넋두리

참선이란 바로 이 마음을 찾는 공부이다.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이 마음을 직접 찾는 지름길이 바로 참선이다.

불도를 닦는 사람들도 감히 선법에 들어서지 못하는 것은 모두들 저 아무 것도 아닌 허공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고,겁을 내어 멀리 절벽만 쳐다보다가 물러서 도망치기가 일쑤다.

그러므로 근래에 불도를 닦는 사람들은 대개가 불교의 지식을 구하는 이들뿐이고, 자심불의 도를 깨닫는 이는 흔들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시달리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먹고 출근하고 많은 일과 사교에 시달리고 그리고 저녁이면 솜같이 지쳐서 집으로 돌아간다. 밥을 먹고 잠에 떨어진다. 다음날도 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 그들에게 사찰을 찾을 만한 시간이 없는 것이다. 불교가 그들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러면 한국 불교는 어떻게 대중들을 찾아가야 한단 말인가? 라는 다음 문제가 따라온다.

어떻게 대중들을 찾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승려들의 교육문제와 연관된다. 이제는 극락이라는 기이한 선문답으로써 대중들을 구제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너무나 영악하다. 그들은 환상이라든가 가상적 세계의 약속을 뿌리칠 수 있도록 충분히 영리하다. 그러기 때문에 승려들은 그들과 정식으로 만나는 수밖에 없다. 정연한 논리로서 보리의 참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골목에서 외치는 저 엿장수는 도리어 이 마음, 이 법, 이 소식을 여지없이 설명하고 있다. (싸구려 싸구려, 말만 잘하면 거져 준다오) 이말을 알아들었는가?

다겁으로 힘써 마음을 가진 범부들은 밝고 날카롭고 재치있어 입을 벌리기 전에 이미 알아듣고 마는 것이다. 이 마음은 이미 이 나의 이 마음에 누가 깨달을 수 있으며 무엇을 따로 깨달을 것이 있으랴. 이렇게 여지없이 제대로 된 뒤에는 저 청산 깊숙이 들어가서 산명수려한 곳에서 밝은 달과 흰 구름을 벗삼아 깃들이는 도인도 있고, 혹은 걸인의 행색으로 시정에 들어가 공원이나 거리에나 시장의 한 구석에 앉거나 서거나 돌아다니면서 연대갑자를 다 잊어버리고, ㄴ(?) 빠진 등 신처럼 그날 그날을 지내는 도인도 있다.

그런가 하면 왕사로 출세하여 임금의 스승이요, 국민의 사표로서 인간을 개조하여 사회를 개선하여 지상극락을 건설하는 도인도 있다. 대수도원을 경영하여 인간과 천상의 사표가 될 수 있는 수천명의 승도들을 빈틈없이 지도 육성하고 있는 도인도 있다. 또는 대자대비하여 청정엄숙한 도인도 있는 반면에 광인행과 잡승행도 있다.

이렇게 신비막측한 수도행각에 있어서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므로 법부의 속정으로써 왈가왈부는 범부와 성인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초월하여 사의불용하는 해탈 아닌 해탈만행에 대하여 누가 감히 미오를 말할 것이며, 또한 선정이니, 태식이니를 말할 수 있으랴.

참선하면 견성한다고 자꾸 참선만 하고 앉아만 있지, 그러나 참선을 무엇을 무엇 때문에 하는 줄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참선하면 견성성불한다고 그러는데 견성성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니 큰 일이다. 옳은 선지식 만나서 그런 걸 다 알고 참선도 다 해본사람, 그런 선지식 만나 공부하면 그 지식이 되기 때문에 무위법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다.

요새 정립이란 말을 쓰는데 인생관이 정립됐다, 국가관을 정립한다,확실하게 결정을 해서 흔들리지 않고 튼튼하게 서 있다. 그런 뜻이다. 불교에는 또 선정이란 말이 있다. 참선을 하는데 다른 생각 하나도 없이 화두만 뚜렷한 그것을 선정이라 하고 삼매에 들었다고 한다.

염불이나 참선이나 진언이나 어떤 공부를 해서 내 몸뚱이도 없고 생사도 없고 그렇다고 자는 것도 아니며 허망한 환상에 빠진 것도 아닌 깨끗한 정신이다.

우리는 동서남북으로 마음이 갈가리 찢겨져서 잠도 못자고 마음도 편치 못한데 이 마음이 딱 정립이 돼서 가장 깨끗한 기분, 잡념이 하나도 없는 또렷한 마음만 남아 있을 때, 마음이 정립되어 선정 삼매에 들어섰을 그때에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안락할 때다.

성품이 곧 이 마음이니 마음과 성품이 둘이 아닌 이치를 확실하게 깨친 사람을 조사라고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자기의 심성을 깨닫는 때에야 비로소 달마선종이 전하는 말도 글원도 아닌 교외별전의 이상야릇한 이치를 의논할 수 있다. 중생들이 천만억겁을 살아오면서 세세생생에 익힌 버릇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이 세가지 마음이 뿌리 깊이 마음에서 박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부득이하여 선정 닦는 방법과 방편지혜를 가르쳤다. 만약 누구든지 이 마음이 본래부터 언제 한번 번뇌망상을 일으켜 본 적이 없는 것을 알고 보면, 무엇을 닦으며 따로 또한 깨달을 법이 있으랴.

보통 초학자로서는 오히려 면방하고 의혹하는 것이 무리가 아닌 것이다. 선종에서 말솜씨나 배우고 돌아 다니는 사람들에 있어서 말로나 생각으로서는 턱도 닿지 않는 앞뒤가 뚝 끊어진 이 화두에 대하여 두 가지로 논평하고 있는데 그 한가지는 조사들의 공안은 이것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그 살림살이 전체 내용을 그대로 흠뻑 드러내놓은 것이라고 하여, 둘째는 화두를 일심 으로 의심하는 바람에 모든 사견과 번뇌망상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여 본래 마음 자리가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가 다 천만부당한 소견들이다. 참으로 총명 영리한 사람들은 이따위 어리석은 망상을 내지 않고 바로 정직하고 날카로운 판단으로 뜻깊이 알아차려 화두를 생각 하되, 마치 큰 바위가 태산 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것과 같이 점점 가속도로 굴러서 보기만 해도 무섭게 정진해 갈 뿐이다.

선지식, 스님네들이 화두의 참뜻을 몰라 그 의심이 마음 가음데 꽉 맺혀서 자나깨나 그 의심을 놓을 수가 없게 되면 이것을 참으로 생사를 해탈하고자 하는 진실한 발심인 으로서의 참으로 알고자 하는 의심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얼마 동안은 의심이 쭉 잘 나가다가 가끔 의심이 없어지곤 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신심과 결단심과 성심이 부족한 탓이다. 그것은 번뇌망상에 끌리고 잠에 속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공부는, 이것을 주작화두의 공부라고 하여 참선이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한층 더 마음을 가다듬으며 몸을 다시 한번 더 단정하게 도사리고 앉아서 온전하고 똑똑한 정신으로 화두를 잡두리해야만 한다. 만약 잠마군이가 와서 덮치고자 하거든 빨리 그 즉시로 자기가 잠에 쏠려들어가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잠이 오기 시작하면 벌써 눈가죽이 무겁고 뻣뻣하기 시작한다.이러한 때에 얼른 다시 정신을 챙겨서 몸을 다시 단정히 입속말로 조용하게 화두를 한두번 들먹거리면 잠이 달아나고 온전한 마음으로 참선으로 참선이 잘되느니라.

그래도 만약 잠이 완전히 물러가지 아니하며 화두가 똑똑히 의심이 되지 아니하고 희미할 때에는 일어나 마당에 내려서서 발끝만을 디디고 수십보를 천천히 걸으면 눈이 가뿐해지고 정신이 깨끗해지느니. 다시 자리에 가 앉아서 천번 만번 화두를 챙기며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와 같이 생명을 떼어 놓고 애를 써가며 차차로 공부가 순일해져서 힘쓰지 아니하여도 공부가 저절로 굴러가며 화두의 의심이 천만배나 힘차게 나가게 되느니라. 이렇게 된 연후에는 화두를 놓을래야 놓을 수가 없게 된다. 마치 산상에서 막 내리구르는 큰 바위와 같아서 붙잡기는 커녕 그 근처에도 갈 수가 없이 쏜살같이 구르는 것과 같이 되느니라.

참선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첫째로 조심할 일은 전부 욕심을 부려 헛애를 많이 써서 상기가 되거나 몸에 병이 나게 하여서는 공부를 잘 못하는 것이다.

대저 좌선은 힘쓰는 사람은 다만 몸을 단정하게 앉아서 눈을 보통으로 뜨고 또 한 몸과 마음을 구태여 돌아보지도 말며 생명조차 생각지 말고 화두만을 하되 혹시 정신이 희미하여 곤하거나 번뇌망상이 일어나거든 다시 한번 정신을 챙겨서 정진하면 차차로 힘을 얻어서 눈이 안정하며 따라서 마음이 안정하고 마음이 안정하면 몸이 안정하느니라. 그러면 곧 선정력을 얻어서 시간이 가는 줄을 알지 못하며 몸과 마음이 가뿐하고 한없이 안락하느니라.

그러나 기능을 삼아서는 도리어 사도에 떨어진다.

참선공부로 성취하고자 하는 이는 첫째로 인정을 멀리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구멍 뚫린 독에 물을 채우기와 같아서 뒷구멍으로 정신이 새서 흘러가는 곳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자기 허물을 깨닫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내다 보면 공연히 시주들의 공밥만 썩히고 헛되이 늙고 마는 것이리라.

정말로 간절히 공부하는 사람은 고개를 뒤로 젖혀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며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지 아니하고 산과물을 보아도 산과 물이 아니며 다니더라도 다니는 것을 모르고 앉아도 앉은 것을 모르며 천만대중 가운데 있어도 한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몸이나 마음 할것없이 전생명을 통틀어 뭉쳐서 한 개의 화두에 대한 의심덩어리만 남는 것이다.

이 의심을 타파하지 못하면 맹세코 일어서지 아니할 것을 각오하는 것이다. 마치 실족하여 큰 불 속에 빠진 사람과 같아서 여기서 무슨 잡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놈아! 곧 나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낼 사이가 없다. 그저 곧 달아나는 것이 가장 상책인 것이다. 옛과 지금을 막론하고 공부로 성취한 사람들은 다 이와 같이 했느니라.

淸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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